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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마이너스 1의 평화

출저: http://zarakseodang.com/zarak/zarak/zarak4.php?mid=14&r=view&uid=312


<< 마이너스 1의 평화 >> 진중권

* 비폭력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화해의 희생양을 하나 뺀 모든 사람의 일치다. (르네 지라르)


이지메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 집단적 범죄의 주인공은 고교생들이었다. 다시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때 범인은 중학생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또 그 말을 들었다. 이번엔 초등학생이란다. 기자들이여. 이제 유치원에 눈을 돌리라. 이지메를 당한 김개똥 원아(무직 5살), 삶에 회의를 느끼고 투신.’ 최연소 자살. 세계적 특종 아닌가.

"어린이는 천진난만하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건 천진난만한 어른이들이나 믿는 동화다. 애들이 노는 걸 보라. 얼마나 더럽고 치사하고 비열하고 역겨운지. 물론 우리 때도 따돌림은 있었다. 나도 종종 당했다. 가령 "잠수함의 프로펠러…"라는 남의 말을 "잠수함의 스크루"로 교정해준 대가로 난 가끔 공동체의 제재를 당해야 했다. 물론 그건 지독하지 않았다. 길어야 며칠이면 제재는 해제되고, 내가 다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레베스트가 아니라 에베레스트\"라고 진리를 말할 때까지, 난 아무 문제없이 놀이집단에 섞일 수 있었다.

근데 이지메는 차원이 다르다. 그건 개인에게 가하는 집단적 폭력, 제도적 따돌림이다. 왜 들 이 짓을 하는 걸까? 이 괴상한 문화는 도대체 비롯된 걸까? 일본에서 건너온 왜색 문화? 치사하게 남 탓 할 것 없다. 결정적 원인은 괴상한 집단주의에 천박한 이기주의가 모순적으로 결합된 아수라, 즉 한국사회 자체에 있으니까. 이건 내 가설이다. "이지메란, 정치적으론 파쇼독재에 천박한 자유주의가 결합한 결과, 역사적으론 해방 전 일제의 국가주의적 식민 지배에 해방 후 미국식 천민자본주의 문화가 천박하게 중첩된 결과가 우리 2세들 사이에서 뒤늦게 문화적으로 발현되는 현상이다.”이제 내 가설을 그럴듯하게 만들어 보겠다.

학교는 신화적 폭력의 세계다. 이 무한경쟁의 세계에서 만인은 만인의 적이다. 네가 자고 있을 때에도 경쟁자의 책장은 쉬지 않고 넘어간다. 네가 쉬고 있을 때 친구라 불리는 적들은 사정없이 네 머리를 밟고 위로 올라간다. 이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유일한 정의는 폭력이다. 그래도 사람의 새끼들이라고 동물과는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질서를 수립해야 했다. 어떻게 서로에게 행하는 폭력의 잠재력을 오직 한 명의 약자에게 집중적으로 투사하기로 약속을 하는 것이다. 다대다(多對多)의 어지러운 폭력이 다대일(多對一)의 조화로운(?) 폭력으로 이행할 때 비로소 학급에는 질서가 생긴다. 위대한 마르크스. 과연 그의 말대로 인류의 역사는 학급투쟁(Klassenkampf)의 역사였던 것이다.

타자라는 이름의 약자를 배제하는 최초의 원(原)폭력을 통해 비로소 다수자의 정체성과 선악의 기준이 마련된다. 선악을 비로소 있게 하는 근원적 폭력은 그 자체로서는 아직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그것은 선악의 피안에 있는 것이다. 선악의 구별에 선행하므로 도덕적 정당화도 필요 없다. 그리하여 부조리한 폭력이다. 선악에 선행하는 원(原)폭력은 작의적이다. 그 폭력이 누구에게 떨어질지, 왜 하필 그에게 행사되는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 근원적 부조리. 이 앞에서 개체들은 무한한 공포를 느끼고, 이 공포는 잔인한 공격본능으로 전화한다. 공격을 피하려면 공격자, 즉 집단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희생양을 공격할 때 불안한 개체들은 무한한 잔인성으로 집단을 향한 충성심을 경쟁적으로 입증한다.

집단과 하나가 되는 한에서만 개체는 안전하다. 그리하여 부조리한 실존들은 괴상한 집단주의 속에서만 구원을 찾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필사적으로 자기를 집단과 동일시하려 한다. 그 집단은 작게는 교실 안의 패거리, 크게는 국가와 민족일 수 있다. 집단과 동일시에 실패하는 자는 공동체의 성스러움을 지키기 위한 희생양이 된다. 그러다가 희생자가 사라지면? 문제없다. 개별자들은 집단 속에서 기어이 또 하나의 모난 놈을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또 하나의 희생양이 선택되면, 적어도 그가 존재하는 동안은 개별자들은 다시 안심하고 살아간다. 그리하여 전체 빼기 하나의 화해와 평화. 보편적 카오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이너스 1의 제의(祭儀).

르네 지라르는 평화와 질서를 수립하는 이 지혜(?)를 문명 자체의 본질로 보는 듯하다. 하지만 과도하게 근본적인 비판은 결국 현상(status quo)의 정당화로 귀결된다는 역설에 대해 그는 어떤 대답을 준비해 놓고 있을까? 기원의 폭력성이 폭력의 정당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지메는 정당한 현상도, 보편적 현상도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회에서 특정한 인간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아주 특정한 방식의 이름일 뿐이다. 의사가 환자의 몸 표면에 나타난 표식으로 신체 내부의 상태를 읽듯이, 이지메라는 현상을 통해 우리 사회내부의 깊은 병적 징후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