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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중동

20151210 BBC 시리아의 분쟁의 역사 (BBC.This World - A History of Syria, 2013)


BBC.시리아 분쟁의 역사 (2013)

원제 : This World - A History Of Syria With Dan Snow (130311)

 

현재 시리아의 내전 상황은 해결 기미가 없고, 더군다나 장기화 될 조짐이 보입니다. 

종파, 인종, 거기에 국제적 이해관계까지 얽히면서 단순한 민주화 시위가 아닌 내전으로 발전했는데

시리아 내전이 어떻게 이렇게 복잡하게 됐고, 왜 해결이 쉽지 않은지

역사적인 시각으로 접근한 다큐입니다.

 

 

 

 

1. 수니 / 시아 이슬람

 

(1) 고대 시리아 와 로마시절

고대 시리아 (Greater Syria 또는 Greater Assyria) 는 B.C.4세기에 그리스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는데, 이때 '시리아'라는 용어가 정립됩니다.

<고대 시리아 제국 >

현재의 레바논.시리아.팔레스타인.이스라엘 지역과 

터키.요르단.이라크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고대 시리아 지역에 살던 페니키아(Phoenics) 인들은

B.C.12-8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때

현대 알파벳의 원형인 페니키아 알파벳이 나타난다. 

파닉스(Phonics) 라는 말도 여기에서 기원하였다.

< 현재의 시리아 와 중동의 모습 >

B.C.6세기에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B.C.4세기에는 그리스의 지배를

받았으며 B.C. 64년부터 로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시리아는 B.C.64년에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이 지역은 로마제국에게도 중요한 곳이었고

무역로의 중심이었던 만큼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는 번성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곳은 로마의 중심지중 하나였으며, 베카계곡에 엄청난 규모의 로마 사원이 건설됩니다.

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A.D.313년에 '밀라노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공인했고, 로마는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이에따라 당시 로마 지배하에 놓여있던 시리아도 기독교를 받아들입니다.

(기독교-정확히는 동방정교는 현재까지도 살아남아 시리아 전체인구의 10%정도가 기독교도입니다.) 



< 로마제국의 영토 >

로마 제국으로 인해 시리아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 문명의 발상지인 비옥한 초승달 지대 >

현재까지도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싸움은 끊이지 않으며, 

이곳은 지정학적 중요성 뿐만 아니라, 비옥한 토지와 석유을 

둘러싼 자원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2) 4대 정통칼리파 시대와 카르발라의 비극

이슬람의 선지자인 무함마드(마호메트 570-632) 가 A.D. 632 년 사망하자 그 후계자를 선출로 뽑게 되고

4대까지는 무난하게 선출됩니다. 


< 선출제 정통 칼리파 시대> * 칼리파 = 정치지도자, 이맘 = 종교지도자

1대 칼리파 (632-634) - 아부바르크 (A.D. 573-634)

2대 칼리파 (634-644) - 우마르 (A.D. 579-644)

3대 칼리파 (644-656) - 오스만 (A.D. 577-656) 

4대 칼리파 (656-661) - 알리 이븐 아부 탈리프 (A.D. 600-661) : 1대 이맘이며 '이맘 알리'로 불림 / 아들은 3대 이맘인 '후세인 이븐 알리'


< 세습제 칼리파 왕조: 우마이야(Umayya) 또는 옴미아드 왕조의 시작>

1대 옴미아드 왕조의 칼리파 (661-680) - 무아위야 1세 (A.D. 602-680)

2대 옴미아드 왕조의 칼리파 (680-683) - 야지드 1세 (A.D. 647-683)


서기 632년에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이슬람제국의 정치지도자인 칼리파는 1대부터 4대까지 비교적 순탄하게 선출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정통칼리파 시대라고 합니다.

하지만 3대 칼리파였던 오스만 이 암살당하자 6촌 관계였던 무아위야(Mu'awiyah) 는 가문의 복수를 위해 4대 칼리파인 '이맘 알리'와 전투를 

벌입니다. (오스만 과 무아위야 는 '우마이야(Umayya) 가문 출신이었음)

당시 무아위야 는 혈족이었던 3대 칼리프 오스만의 암살 사건이 해결되기도 전에 이맘 알리가 4대 칼리프에 서둘러 임명되자   

이에 반발해 전쟁을 벌입니다. 


첫 전투인 낙타전투(A.D. 656년)에서 알리가 승리했고, 두번째 전투인 십핀전투(A.D.657년)에서도 알리가 유리했습니다. 

이에 불리해진 무아위야 의 군대는 협상을 요구했으며, 협상 과정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확보합니다. 

A.D. 661년,이라크 지역으로 돌아간 알리가 카와리지 파에게 암살당하자 무아위야는 스스로 칼리파에 등극하고 

아들 야지드(Yazid)에게 칼리프 직를 세습해, 우마이야(Umayya, 또는 옴미아드) 왕조를 열게 됩니다.

이후부터 칼리파(Khalīfah, Caliph)는 세습제로 변하게 됩니다.



< 680년의 카르발라의 비극>

1대 이맘이었던 '이맘 알리'의 아들이자 3대 이맘으로 '이맘 후세인' 이라 불렸던 후세인 이븐 알리와 그의 추종자들이

서기 680년에 이라크의 카르발라 인근에서 야지드 1세 가 보낸 군대에게 몰살당한 사건입니다.

당시 후세인은 무아위야가 죽자 칼리파 직을 회복하기 위해 아라크 인근 카르발라에서 군사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결국에 이슬람교는 '카르발라의 비극'으로 불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수니파와 시아파로 갈라서게 됩니다.


* 수니 = 관습/정통파 = 다수파 (이슬람 인구의 85%) 

* 시아 = 추종자파 = 소수파 (이슬람 인구의 15%)


주류인 수니 이슬람교도들은 카르발라 사건이후 세습되기 시작한 이슬람 왕조들의 칼리프 들을 비교적 순탄하게 인정하는 반면, 

비주류인 시아 파는 무함마드(마호메트)의 사촌이자 사위인 '이맘 알리'와 그의 아들인 '이맘 후세인'만을 정통 칼리파 로 인정하였습니다.

시아파가 이렇게 보는 이유는 이맘 알리가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라는 혈연 관계에 있었기 때문인데, 시아파는 이런 혈연적 관계를 

지닌 자만을 순수 계승자라고 보았습니다.

 

< 이맘 알리 / 마호메트 / 이맘 후세인 가계도 >

무함마드에게는 파티마 라는 딸이 있었고 이맘 알리는 무함마드와 사촌관계였는데, 나중에 파티마와 이맘 알리는 결혼을 하게됩니다.

따라서 이맘 알리 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관계가 됩니다.

이후에 이맘 알리와 파티마 사이에 둘째 아들인 후세인 이븐 알리 가 태어났고, A.D. 680년 3대 이맘이었던 후세인은 이라크의 카르발라 에서

야지드 1세에게 죽게 됩니다.

 

 

카르발라 사건이후 시아파들은 현재의 이라크 지역에서 밀려나 황폐한 지역인 현재의 이란 지역으로 이동해 자리잡게됩니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혈통만을 정통 계승자로 인정하고, 후세인을 따르던 정치.군사 조직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이들은 좀 더 강경한 종파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세습제 왕조의 칼리파들도 무리없이 받아들였던 수니 는 좀 더 유연한 성격의 종파적 성격을 지니고 있고, 비교적 관용도가 높아서 외국인 칼리파를 인정하거나 해외 포교에도 적극적입니다. 그래서 중동 이외의 이슬람 국가들은 모두 수니 이슬람국이 됩니다.



< 아랍국의 종파별 비율 : 짙은 색일수록 시아파가 다수인 국가>

      < 아랍국의 시아파 : 전체인구중 시아파 인구와 비율 >

 




 

 < 옴미아드 왕조 시기의 시리아 > 

이슬람 세력이 636년 시리아에 들어온 이후에도, 시리아는 지속적으로 중요했으며, 아랍의 중심지가 됩니다.

7세기~8세기에 걸쳐 스페인에서 인도까지 세력을 확장한 우마이야(Umayyad) 왕조가 다마스쿠스를 중심 도시로 삼았기 때문이며,

8세기 중반 우마이야 왕조가 중심 도시를 바그다드(Baghdad)로 옮기기전까지 다마스쿠스는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3) 십자군과 오스만 투르크

11세기이후 십자군 전쟁때, 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살라딘(살라흐 앗 딘)'입니다.

그는 이슬람의 옛 영토을 회복하고 특히 기독교도들로부터 예루살렘을 되찾았던 이슬람의 진정한 영웅이었습니다. 

(살라딘은 사자왕 '리처드 1세'와 있었던 일화들로 유럽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살라딘은 수니 파였으며, 따라서 수니의 영향력은 중동에서 절대적이 되었고, 시아 의 영향력은 여전히 약했습니다.


< 술탄 '살라딘'과 사자왕 '리처드 1세', 구스타브 도레 >

 

 

 

(4) 14세기 알라위 학살 사건

시리아에서는 14세기 초에 수니 성직자가 시아 분파인 알라위(Alawi, Alawites)파를 이단으로 선포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는데,

이 포고령에 따라 레바논의 트리폴리 항구의 거대한 옛 십자군 성채에서 알라위 시아파 2만명이 수니에게 살해당합니다.

알라위 파는 이맘 알리를 극도로 신격화해서 숭배하고, 기독교 교리의 일부인 부활절도 받아들이는 등 기존의 시아파와도 달랐습니다.

당시의 알라위 파 억압 사건으로 이들은 다수의 수니 들과 떨어져 지중해의 산악지역으로 피신하여 독자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됩니다.

< 시리아의 종파 분포 > 

알라위들은 지중해 인근의 산악 지형에 주로 거주한다. 

 

< 시리아의 사자상위에서 국기를 흔드는 시위대 >

시리아 분쟁은 '아랍의 봄'을 겪은 여타의 다른 아랍국들과 달리

종파간 분쟁의 성격까지 가지고 있어서, 상황이 더 복잡하다.




이후 시리아는 1516년 오스만제국에 정복당하고, 1918년 약 400여 년간 오스만제국의 지배가 끝날때까지 알라위 파는 시리아의 주류로 

나서지 못합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고 시리아 인구의 12% 정도만을 차지하고 있는 알라위 들이지만

이들은 1946년 독립이후 시리아에서 가장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세력으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1970년부터 30년동안 정권을 장악했던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과 다시 10년 이상의 독재를 이어가고 있는 

그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 현대통령도 알라위 파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시리아 정부군을 알라위 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식민지 시절의 강대국들의 통치정책때문입니다.


 

 

 

 

 

2. 식민지 시대의 조약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시 시리아를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는 독일편에 섭니다.

이때 아랍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대두되었고,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하기 위해 아랍 민족주의자들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합니다.

당시 아랍 민족주의자들을 이끌었던 인물이 파이잘(Faisal bin Hussein) 왕자였는데, 영국군 군사고문인 T.E. 로렌스와 함께

오스만 제국의 헤자즈 철도를 공략하는등, 성공적인 군사작전을 펼칩니다.

  


<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1962) >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중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군사고문이었던 영국군 장교 T.E.로렌스 를 다룬 

피터 오툴 주연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 T.E.Lawrence '아라비아의 로렌스' 의 실제 모습 >




 



이러던 와중에, 1915년 영국과 아랍민족주의자들사이에 맥마흔 선언(The McMahon–Hussein Correspondence) 이 이루어지는데,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 판무관인 맥마흔(Sir Henry McMahon)이 메카의 샤리프(이슬람 지도자)인 파이잘 후세인(Faisal bin Hussein) 왕자에게

10여차례에 걸쳐 왕복 서신을 주고받으며, 전후 아랍인의 독립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고 약속한 선언입니다.

이것은 1차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과 대항하고 있던 영국이 오스만 제국내 아랍 민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다음해인 1916년에는 1차세계대전 종전을 대비해 영국.프랑스.러시아 사이에 비밀조약인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이루어집니다. 


그 다음해인 1917년에는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이 이루어지는데, 영국의 외무장관이었던 아서 밸푸어(Arthur James Balfour)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독립 국가 건설을 인정한다고 영국의 유대인 금융가문이었던 로스차일드(Rothschild)에게 서신으로 약속하면서 

이루어진 선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지역은 팔레스타인으로 불리웠고, 이스라엘이라는 지명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승전국 당사자들인 유럽의 강대국들은 1차세계대전중에 이루어졌던 다른 조약들은 무시하고

1916년 연합국 당사자들 사이에 비밀리에 이루졌던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라 자신들만의 이권을 챙겨나갑니다.

특히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은, 영국.프랑스.러시아 사이에  맺어진 비밀조약이었으므로, 철저히 강대국만의 이해가 

반영된 것이었고, 이에 따라 이라크와 요르단은 영국에, 시리아는 프랑스에 귀속됩니다. 한편 러시아에게도 터키의 동부지역이 주어졌으며, 

팔레스타인은 공동관리 지역이었습니다.  



< 사이크스-피코 협정, 1916년>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 경(Sir Mark Sykes) 과 프랑스의

프랑수와 조르주 피코(François Georges-Picot) 가

조약 담당자였으며, 제정러시아는 이 협상의 부분적

참가자였다1917년 10월의 러시아혁명 이후, 

볼셰비키에 의해 이 협정은 공개되었다. 이에 영국은 

당황했고, 아랍인들은 경악을 금치못했으며, 터키는 

기뻐했다고 한다.

< 사이크스-피코 협정과 영국.프랑스.제정러시아 구역, 팔레스타인은 국제관할 >

영국.프랑스.러시아 사이에 이루어진 비밀 협약이었던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그림에서 볼수 있듯이 지도의 위쪽은 프랑스 구역(현재 레바론.시리아), 

아래쪽은 영국 구역(현재 요르단.이라크)이고, 터키의 동부 일부는 러시아에 

귀속되었다. 팔레스타인(현재 이스라엘 지역)은 공동관리 구역이다.






이 시기의 조약들은 1차대전 직후뿐만 아니라 20세기 전반에 걸쳐 그리고 현재까지도 중동 전체에서 엄청난 영향을 갖게 되는데

1차 세계대전 발발 다음해부터 1915년(맥마흔 선언), 1916년(사이크스-피코 협정), 1917년(밸푸어 선언) 에 차례로 맺어진 이 조약들에서

강대국들은 아랍민족 지도자인 파이잘 후세인에게 독립국가를 약속했고(맥마흔 선언),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려 했으며(사이크스-피코 협정), 

아랍 민족들의 거주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했습니다.(밸푸어 선언).

이 세가지 조약의 성격은 서로 모순된 것으로 동시에 실현될 수 없었으므로, 최종적으로는 강대국들만의 이득을 추구하는 조약만이 이행되어 

이후 식민지 시대가 끝나는 시점인 2차 세계대전(1939-1945)이후에도 이 지역 정세에 엄청난 문제들을 야기합니다. 

특히 1915년 맥마흔 선언과 1917년의 밸푸어 선언은 시리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라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야기했고

더 나아가 레바논의 헤즈볼라, 1차-4차 중동전까지의 직간접 원인이 되어, 중동 문제를 더욱더 복잡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 헨리 맥마흔 경, 1862-1949 >

1915년 맥마흔은 당시 아랍의

파이잘 왕자에게 아랍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한다.





< 로스차일드 - 니얼 퍼거슨 교수의 책 > 

유대 금융 가문인 로스차일드 가를 다룬

하버드대 니얼 퍼거슨 교수의 책.

1917년 1차세계와중에 로스차일드 가는

영국 외무장관인 아서 밸푸어에게서

유대인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 받는다.



< 1948년 독립후 이스라엘이 점령한 영토 >  

1915년 맥마흔 선언과 1917년 밸푸어 선언은 아랍과

유대인에게 상반되는 약속이었고, 당연하게도

이 두가지 약속은 1차세계대전 종전후 지켜지지 

않았으며, 2차대전후에도 영국은 무책힘한 후속처리만을

남기고 떠나버림으로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잉태시켰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종전된 그 해인 1918년, 프랑스는 곧바로 시리아에 위임청을 설치하여 통치를 시작해 나아갔으며, 

이때 프랑스가 취했던 가장 중요한 조치는 베이루트와 트리폴리 항구를 기독교 세력(동방정교)에게 이양하여, 레바논으로 분리해 내고, 

다시 시리아를 지역별로 나눈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이런 조치로 역사적으로 하나의 나라였던 시리아는 레바논과 시리아로 갈리게 되었고, 

또한 가장 큰 강점이었던 시리아의 해양세력은 크게 약화됩니다.

이후 프랑스가 취한 일련의 식민 정책들은 이후 시리아의 현대사에 커다란 문제들을 야기합니다.



< 시리아와 레바논 >


< 시리아와 주변국 >









3. 하페즈 알-아사드 (Hafez al-Assad)

 

(1) 쿠데타 와 바스당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끝나고, 본격적인 식민통치가 시작된지 얼마후인 1920년에 

아랍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시리아-아랍왕국이 건국되었으나 불과 몇 개월 뒤 마이살룬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하여, 

시리아는 완전히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 프랑스는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시리아 인구의 12%를 차지하고 있던 알라위 시아파에 주목합니다.

당시 시리아 인구의 2/3는 다수의 수니 파였고,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이들을 프랑스는 의도적으로 권력에서 배제시킵니다.

이에 대한 대안 세력으로 프랑스가 주목했던 알라위파는 소수의 시아파였고, 역사적으로도 수니 들에게 끊임없이 억압받아 왔습니다.

이때 많은 알라위들이 식민지 군대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로 인해 이들은 독립이후 혼란의 시기와 그 이후까지도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수 있게 됩니다.

 

1944년 시리아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고, 1946년에 프랑스군이 모두 철수함으로써 드디어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됩니다.

독립이후 안정과 혼란을 거듭하던 와중에 1963년 일단의 젊은 알라위 군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기존 지주들을 몰아내고 사회주의 체제를 채택합니다.

당시 쿠데타의 주요 세력은 알라위 군 장교들이었는데, 이들이 주로 활동하던 정당은 소수파였던 알라위 와 기독교도들이 주를 이루었던 

바트당(Ba'ath Party)이었고, 이들 바트당은 단일 아랍사회주의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아랍 정당으로 세속주의 이슬람을 채택하고

사회주의 색채가 강했던 당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랍사회주의부활당(Arab Socialist Renaissance Party)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1963년의 알라위 군장교들의 쿠데타 이후에도 정국은 계속적으로 불안했고, 1970년 하페즈 알-아사드가 역시 또 하나의 쿠데타로 

집권하게 되어, 그의 30년 군사독재가 시작됩니다.

  


< 하페즈 알-아사드의 생전모습과 소련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던 시절 (맨위) >




< 하페즈 알-아사드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의 모습>

하페즈 대통령의 아버지, 즉 바샤르 의 할아버지 이름은

'와히시(사나운 동물)' 였으나, 그 이후 사자를 의미하는

'아사드' 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2) 4차중동전쟁

 

- 1차중동전(팔레스타인전쟁, 독립전쟁) :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참가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중동은 바로 전쟁을 선포합니다.

하지만 이때 중동은 내부 문제가 더 급했고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 이스라엘 전쟁은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끝납니다.

< 1차대전-2005년 사이 이스라엘의 영토 변화 >

 



< 1947년 UN 분할안 과 48년 이스라엘 건국 당시의 영토 >

1947년 11월 UN에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분할안을

결정했는데, UN결의안에 따라 당시 10%정도의 땅만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은 절반정도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

< 1947-2003년간의 팔레스타인 영토변화 : 최근 8m높이의 장벽이 세워졌다 >




 

 

- 제2차 중동전쟁 (수에즈전쟁, 시나이전쟁) : 영국, 프랑스 참가

1956년 이집트의 나세르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경영권을 소유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결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는 하였지만 미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1956년 11월 정전이 이루어졌으며,

UN총회에서 영-프-이스라엘 3개 점령군의 즉각 철수가 결의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의 수에즈운하 국유화가 인정되었습니다.

 

 

- 3차 중동전쟁 (6일전쟁) :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참가

1967년 4월 시리아-이스라엘간에는 골란고원을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1차 중동전쟁후 체결된 정전협정에서 비무장지대로 설정된 골란고원 일대에 이스라엘이 농작물을 경작한다는 일방적인 조치를 발표하여

대 시리아 감정을 격발시키게 되었습니다. 
이집트는 아카바 만의 입구인 티란 해협을 봉쇄한 것을 계기로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의 원조를 받는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가자지역, 구예루살렘지역, 요르단강 서안지역, 골란고원, 시나이 반도의 8,600㎢를 새로 점령하였습니다. 
이로서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들어간 영토 면적은 이스라엘 독립 초기의 8배가 넘는 102,400㎢로 확대되었으며,

이로인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활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됩니다.



< 1967년 3차중동전이후 영토 변화 >

< 3차중동전에서 시나이 반도로 향하고 있는 이스라엘 기갑부대 >


                                    

-  제4차 중동전쟁(라마단 전쟁, 욤 키푸르 전쟁)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과거 3차례 중동전쟁에서 잃었던 영토 회복을 위해, 10월 6일 수에즈 전선과 골란고원의 양전선에서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전쟁 초기 이스라엘의 피해는 막심했으나 (특히 소련제 대전차 무기로 인해 기갑전력 피해가 컸음), 

미국의 적극적 지원으로 이스라엘군은 반격에 성공하였으며, UN에서의 미-소 결의로 휴전이 성립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점령한 골란고원을 1981년 합병했으며 이 문제로 2000년 시리아와 평화협상이 중단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전쟁 중에 아랍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감행한 '석유의 무기화'는 산유국의 발언권 강화를 가져왔으며,

이때 석유 유가가 4배나 뛰면서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납니다.

(경제학 분야에서는 1973년 1차 석유파동으로 디플레이션 이라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 케인즈주의가 막을 내리고, 신자유주의가

새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4년 신자유주의의 아버지였던 하이에크가 노벨경제학상을 받고 학문적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 3차-4차 중동전때의 이스라엘 영토 변화 >








< 1차-4차 중동전으로 인한 영토변화 >








< 2011년 이스라엘 영토 상황 >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는

예루살렘은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성지이며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될 당시 시점에는 

서예루살렘(이스라엘)/동예루살렘(요르단)으로 

분리되었으나,1967년 3차중동전쟁이 끝나자 

예루살렘 전체가 이스라엘 점령하에 놓였으며 

현재까지 중동에서 커다란 분쟁 원인이 되었다.

 




 

4차 중동전에서 시리아는 패하게 되지만, 전쟁을 일으켰던 시리아의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은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자의 이미지를 얻게 되었고, 아랍세계의 자존심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와 하마스 >

4차 중동전이후 아랍세계와 이스라엘간의 

대규모 전면전은 없었지만 이스라엘 내외에서 

소규모 전투는 끊이지 않고 있다.


< 이스라엘 여군 >

이스라엘은 여성들도 의무복무이고, 대부분은 지원 병과에 근무한다.

전방의 전투현장에는 투입되지 않으며, 주로 인사.비서.간호 분야에 복무한다.

이스라엘은 기본적으로 모든 국민들이 의무복무를 하지만, 수시로 전투가 

벌어지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에 따른 군복무 기피 현상이 있기도 한다.

                          




                                                                       

 

 

(3) 무슬림 형제단과 하마(Hama) 학살사건

이집트의 이슬람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하산 알-반나(Hasan al-banna)가 영국 식민통치시기인 1928년 '진정한 이슬람 가치의 구현과 확산'을 목표로 수에즈의 이스마일리야에서 설립한 이슬람 근본주의 조직입니다.

이들은 주로 폭력 수단을 사용하고 있으며, 대신에 병원과 학교 건설 등 빈곤층에 대한 의료ㆍ복지 지원 활동에 집중하면서,

10여 개 인근국가에서 지지 기반이 넓은 편입니다.

하페즈 알-아사드가 젊은 시절 바트당 활동을 하고 있었을때, 그는 무슬림 형제단에게 습격 당해 등을 칼에 찔리게 됐고 ,

이 사건으로 하페즈와 무슬림 형제단은 개인적 원한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이러던 차에 무슬림형제단은 1982년에 시리아의 고대 도시인 하마(Hama)를 점령했고, 정부기관들을 습격해 관리들을 살해하고

경찰을 무력화시켜 무정부상태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페즈 알-아사드는 하마에 시리아정부군을 투입해 무차별 포격을 가했고, 무슬림 형제단을 포함하여 1~2만명의 시리아인이 학살당합니다.

도시는 정부군의 포격에 의해 엄청나게 파괴되었고, 학살당한 이들중 상당수는 민간인 이었으나 하페즈는 이에 대해 사과하지 않습니다.

 

 

 

(4) 30년독재와 세습

20세기 중반에 많은 신생 독립국들이 생겨났고, 식민지 시절을 겪은 식민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쿠데타는 빈번했습니다.

아시아.아프리카.중동국가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려져 버렸고, 그에따른 힘의 공백이 생겼습니다.

식민지 국가의 국민들은 교육 수준이 낮았고, 권력은 소수가 독점하고 있었으며, 사회는 지속적으로 불안했으므로

결국은 군부 쿠데타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기에 부족간. 종교간 갈등까지 겹치면 소말리아 같은 상태가 빈번이 반복되곤 했습니다.

 

시리아도 마찬가지였고 1963년 일단의 알라위 파 군장교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기 전까지 사회는 극도로 불안했고

1970년 하페즈 알-아사드가 집권하기전까지도 불안한 정세는 계속되었습니다.

1970년 하페즈 대통령이 또 한번의 군사쿠데타로 집권했을때, 시리아의 소수파인 알라위와 기독교도 뿐만 아니라

안정을 원하던 다수의 수니파도 하페즈 대통령의 통치를 받아들였습니다.

 

하페즈 대통령은 이런 국민적 정서를 이용해 군부를 강화하고, 의회를 무력화했으며, 국민의 권리는 제한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강압과 억압에에도 불구하고, 국민들 대다수는 안정을 위해 독재를 받아들였으며

특히 시리아 경제를 이끌던 수니 중산층들도 안정이라는 과실을 챙기기위해 독재에 침묵합니다.

현재까지도 상당수 수니들이 시리아 사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차중동전의 명분과 국가안정 때문에, 국민들은 하마(Hama) 학살사태 같은 억압에도 불구하고, 독재를 받아들였고

하페즈 대통령의 권력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2000년 6월 그가 사망하자, 국민들은 오열했고 애도의 물결은 시리아를 뒤덮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직은 39세의 아들에게 물려집니다.

 

 

 

 

 

4. 바샤르 알-아사드 (Bashar al-Assad)

 

(1) 초기의 정치개혁

2000년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가 사망했을 때, 그는 39세였습니다.

그는 영국에서 교육받은 안과의사였으며, 2000년 12월 수니 파 무슬림인 아스마 알-아사드 와 결혼합니다.

(수니파와 결혼한 이 조치는 종파를 통합할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 바샤르 알 아사드 (1965-) : 2000년 이후 시리아 대통력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는 제일 좋아하는 가수가 '필 콜린스' 라고 밝히기도 했는데, 영어, 프랑스어를 하고 외국에서 유학한 배경때문에,

시리아 국민은 정치개혁을 기대한다.

하지만 결과는 또 하나의 독재자일 뿐이었다. 그의 부인인 아스마 알-아사드는 뛰어난 미모로 시리아의 다이애나로 불리기도 했으나,

독재자의 부인답게 비난받을 짓을 꾸준히 하고 있다.

 

 

(2) 독재 와 외교정책

그는 취임 초기부터 서구적인 이미지 덕택에(?) 시리아에 민주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됐으나,

취임 1년이 채 안되어 소규모 정치 자유화 조치조차 중단되었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독재를 펼치고 있습니다. 

또한 2005년에는 라피크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 암살 사건 개입으로 서방 국가들에게 국제적인 압박을 받아,

시리아군을 레바논에서 전면 철수시켰으며,

레바논과의 중동 평화 문제를 둘러싸고,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북한과 핵 개발에 협력하고 있다는 의혹으로, 2007년 9월 이스라엘 공군의 시리아 공습이 이루어졌다는 보도가 나온 바 있습니다.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자 아사드는 아버지가 일으킨 하마(Hama) 학살보다 더 혹독하게 정부군을 동원해 시리아반군을 진압하고 있습니다.

 

 

(3) 농업과 경제개혁

시리아는 지정학적으로 중동에 위치한 곳임에도 농업비중이 높습니다.

이는 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인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기 때문이며, 

이로 인해 시리아 경제에서 농업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 시리아의 지정학적 위치>

시리아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 한 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이로 인해 풍부한 농업지대를 지니고 있고, 골란고원처럼

3.4차 중동전같은 분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 시리아의 국토 형태 >

- 방목 가능한 목초지대: 45%

- 비옥한 농경가능 지역: 32%

- 숲: 3% / 나머지 20%: 황무지



이런 농업부분은 전체 경제인구의 17%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데, 2010년 전후로 심각한 가뭄이 휩쓸어 

농업 부분에 엄청난 타격이 가해집니다.


시리아는 1979년 미국에 의해 테러 지원국(State Sponsors of Terrorism)으로 지정되어 오랫동안 경제 불안이 지속되고 있었는데,

2004년 이후로는 무역제재 조치 하에 놓이게 되어 경제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가고 있었고

또한 전체 인구 1,800만명의 12%에 달하는 200만 이상이 빈곤층으로 분류될 만큼 경제적 격차가 심각해 경제적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2000년 취임한 아사드 대통령은 중국을 모델 삼아 경제개혁을 실시했으나, 

기존의 낙후된 경제시스템.만연한 부패.측근 위주의 불공정한 개혁정책등으로 인해 경제 개혁은 실패하게 되며,

경제개혁을 거쳤음에도 여전히 국영 기업이 국내 경제를 장악하고 있으며, 자유로운 민간 분야의 성장은 정체되었고,

경제개혁 과정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측근 일부가 부를 독점하면서 경제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됩니다.


이로인해 2009년이후 시리아의 경상수지는 적자를 기록해 오고 있으며 식료품 물가는 치솟습니다.

결국 2010년 경제성장률은 3%대로 낮아졌고, 청년 실업률도 20% 이상으로 지속되자

청년층을 중심으로 경제적 불만이 크게 높아집니다.


< 시리아 - 주요 경제지표 DB >

지표

단위

2010

*2011

*2012 

 *2013

 *2014

명목 GDP

(억)달러

601

544

439 

349 

299

실질성장률

%

3.2

-3.4

-18.9

-19.0

1.8

1인당 GDP

달러

4,958

4,823 

4,058

3,554

3,665

실업율

%

8.4

14.9

18.0

48.6

-

산업구성

%

농업 16.4%, 제조업 22.7%, 서비스업 60.9%

산업인구

%

농업 17.0%, 제조업 16.0%, 서비스업 67.0%

석유매장량

백만

시리아 25억배럴 (33위) / (사우디 2,684억배럴, 1위)

석유생산량

백만

시리아 40만배럴/일 (32위) / (사우디 1,150만배럴/일, 1위)

기타

%

빈곤율 11.9%

* KOTRA 국가정보 - 시리아 2014 (* EIU 추정치, 2014년은 추정치) 한국 GDP: 14,035억달러 

* The World Factbook - CIA 2014

여기에 산유국들 가운데 비중은 크지 않지만 시리아의 석유 수출은 재정 수입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산유량 감소로 시리아 정부의 경제적인 역량은 크게 감소합니다.
    
결국 2011년 시작되어 시리아까지 도달했던 아랍의 봄 당시에
국제 경제제재, 가뭄으로 인한 농업부분 타격, 높은 (청년)실업률, 경제개혁 과정에서 대통령 측근의 부정부패와 부의 독과점 등으로
시리아의 경제상황은 이미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이로인해 국민들의 경제적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고 곧 민주화 시위로 이어집니다.

(경제학적으로 2011년 아랍의 봄을 풀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관점에 따르면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후 달러화를 포함해 

전세계으로 통화량이 급격히 늘어나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실물 가치가 높아져 전세계적인 실물 부분의 가격 폭등을 일으켰고, 

특히 이런 가격 폭등은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던 중동지역에 심각한 타격을 가해 민주화 시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민주화 시위전의 이집트의 빵 가격 폭등을 이런 측면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5. 시리아의 분쟁 쟁점


(1) 중동 내부의 수니/시아파 국가들간의 역학관계

우리가 시리아 사태를 바라보며 꼭 살펴봐야 할 것은 중동 전체의 종파(또는 각 세력 / 또는 국가)간의 역학 관계입니다.

결국 시리아가 단순한 민주화 요구에서 내전이라는 거대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된 그 근본적 원인이 역사적으로 힘의 교차로였던

시리아에서 이런 힘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사우디로 대표되는 수니 아랍국들은 시리아내에서 반군이 승리를 거둬 또 하나의 수니 정권이 생겨나길 바라며 반군을 적극 지원중인데

이는 이란을 주축으로 하는 시아파의 영향력이 약화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이란은 중동 전체에서 그나마 몇 안남은 시아파 정권을 사수하기 위해서 시리아에 필사적입니다.


< 시리아 주변 국가별 수니.시아파 비율 : 진한색일수록 시아파 비율이 높음 > 




 

(2) 시라아 내부의 종파 전쟁

시라아 내전은 기본적으로 이런 종파간 갈등이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중동전체로 보면 이슬람 제국 건설과정에서 다수의 주류파인 수니와 소수의 시아파로 나뉘게 되는데, (세계적인 분포는 85:15정도입니다.) 

시리아 내부적으로 14세기에 일어났던 다수의 수니 에 의한 알라위 시아파 학살 사건은 알라위 에게 역사적 공포심을 각인시켰습니다.

 

여기에 1차 대전중에 시리아를 점령했던 프랑스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수니들을 배제하고, 소수파였던 알라위로 군을 조직합니다.

이런 군대 조직은 나중에 독립후 1963년의 군사쿠데타로 이어졌으며, 알라위 파인 하페즈 알-아사드 대통령의 집권으로 이어졌습니다.

현재 정부의 주축인 알라위 파들은 시리아 내전에서 패배할경우 가뜩이나 소수인 이들이 과거의 역사적 사건처럼 피의 보복을 당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 시리아의 종교 분포와 인구별 종파 구성 >

알라위는 14세기의 학살사건으로 다수의 수니들을 피해

지중해의 산악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3) 냉전의 산물과 국제적 이해관계

전직 대통령이었던 하페즈 알-아사드는 소련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았고, 이때 형성된 소련과의 관계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러시아는 시리아의 형제국인 레바논 항구를 군사적인 용도로 사용하고 있으며, 냉전시대부터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저지하기 위해 

시리아 정부에 지속적인 군사 원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 시리아행 러시아 무기적재 화물선의 경로 >




이에 대해 미국과 서방은 시리아 반군을 지원하고 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이란의 영향력을 약하시키려는 의도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미국이 시리아 문제에서 만큼은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미 중동내에 이집트.사우디.요르단 같은 다수의 수니파 친미 국가들과 이라크 같은 시아파 친미국가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시리아가 계속 시아파 국가로 남던지 아니면 새로 수니파 국가가 되던지 미국의 대 중동 전략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리아 내전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결국 대규모 지상군 파병이 필요하기 때문에 더욱더 망설이는 듯 합니다.)

다만 시리아의 시아파 정부가 친 러시아 계열이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사태등에 관한 보복차원에서라도 미국은 시리아 문제에

어떤식으로든 지속적으로 개입은 할 것이며 대 중동 정책에 문제가 된다고 판단될 경우을 대비해 늘 예의주시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란이 팔레비 왕조였던 시절이 그립겠군요. 이란 국민들은 부패로 골머리를 앓겠지만요.)

< 1979년 이란혁명 전의 이란 여성들 >

이란의 팔레비 왕조는 친미국가였고,

여성들은 서구식 교육을 받고 서구식

생활방식과 서구식 복장을 했다.

한국의 강남 한복판에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이라는 이름의 도로가 있는 

이유는 같은 친미국가로서 한국과 

상당한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 1980.9월 이란-이라크전: 불타는 정유시설 >

1979년 혁명후 이란은 이라크와 전쟁을 벌인다. 

그 원인은 당시 이라크는 소수 수니파(후세인)가 

다수의 시아파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란 혁명후

이라크의 후세인은 이란의 군사력이 약화된 

것으로 판단해 이란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를 적극 지원했다.)


< 이란 상공의 F-14 일명 '알라캣'과 F-4 전투기>

이란의 팔레비 왕조는 친미 정책을 폈고, 미국산 

무기를 다수 사들였는데, 당시 가장 최신기였던

F-14를 도입했다.

하지만 이란혁명후 당대 최신의 미국기들은

적국의 상공을 지켜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미국내 F-14는 모두 퇴역했지만, 알라캣은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중이다.)





(4) 민주화 요구와 사우디.요르단의 속내

시리아 사태는 기본적으로 30년 장기독재(바샤르 알-아사드까지 포함하면 40년)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된 민주화 운동의 성격이었습니다.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은 곧 시리아에도 당도했고, 2011년 2월에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정치.경제.종파가 복잡하게 결합되어 혼란이 야기되었고, 결국 내전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 아랍의 봄 진행현황 >   

< 시리아 난민 현황 (2013년 3월) >

 

여기에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민주화 운동으로 촉발된 시리아 내전을 지원하는 사우디와 요르단의 진짜 속내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사우디와 요르단은 왕조국가이고, 현재까지는 그리 큰 문제는 없지만 엄연히 언론통제와 1인 통치가 시행되는 곳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런 1인통치의 국가는 우리 역사의 조선의 예에서도 볼수 있듯이 세종이라는 성군도

있었지만 연산군이라는 폭군도 나타날수 있으며, 또한 국민들의 인권뿐만 아니라 목숨마저 권력자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국가입니다. 

사우디나 요르단같은 1인 통치의 왕조 국가들은 언제라도 이런 모순점에 노출될 수 있으며, 현재는 대내외적으로 큰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언젠가는 이런 한계를 보일 것이며 결국에는 민주화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민주화 운동이란 왕가의 통치자들 입장에서 보면 결국 현재의 왕가가 무너져 국민들에게 권력을 돌려주고 

이들 왕가는 권력에서 밀려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사우디나 요르단 왕가에게 절대로 받아들이 수 없는 일이며 

'아랍의 봄' 당시 사우디와 요르단 왕가는 민주화 운동의 영향력이 자국으로 넘어올까봐 엄청난 우려를 보였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시리아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 영향력이 자국에 미치지 않도록 필사적었으며, 

시리아의 민주화 운동이 결국 좌절되어 내전으로 발전했을 때, 사우디와 요르단 왕가는 오히려 안심했을 것입니다.

이후 어찌보면 사우디와 요르단의 지원으로 반군은 군사적인 반격에 나설 수 있었고 이후 시리아 내전은 점점 격해져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습니다. (사우디는 무기원조뿐 아니라 반군에 대한 군사훈련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결국 사우디와 요르단 왕가에게 시리아 내전의 장기화는 결코 나쁜 일만은 아닌 것입니다.





(5) 더욱더 복잡해지는 양상

현재 시리아 반군은 '자유시리아군(FSA, Free Syria Army)'을 조직해 시리아 정부군에 대항하고 있지만, 시리아 국민들 상당수가

장기 독재정권하에서도 안정을 우선시 했던만큼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국민들도 상당수입니다.

더군다나 해외에 있던 극단적인 수니 원리주의 전사들도 시리아내로 속속 모여들고 있어서, 폭탄테러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와중에,

국제 테러조직인 알-카에다(탈레반 과 알-카에다 는 모두 수니파) 같은 조직원들의 움직임마저 포착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반군을 지원하는 측의 국내외 논쟁은 한층 더 가열되고 있으며, 반군에 대한 지원이 이슬람 수니 극단주의자들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역효과마저 나타나고 있는 양상입니다. (여기에 반군내의 세력 구성원이나 각 세력의 입장이 점점 더 복잡해져만 가고 있는 양상입니다.)

이런 상황때문에 내전이나 반군 지원을 바라보는 각국의 입장 차이나 정치 세력들간의 논란이 한층 더 치열해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시리아 내전은 더욱더 장기화 될 양상이고, 내전이 길어질수록 시리아 국민들의 피해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 시리아정부군의 민간인 공습 >

2012년 8월 15일. 시리아 알레포에서 북쪽으로 47km 떨어진

아자즈 마을에서 마을 주민들이 정부군 포격으로 사망한

아기의 시신을 찾아냈다.  

< 시위대속의 여학생 >

2012년 9월 30일. 상업도시 알레포 버스탄 알 카스르 지구에서

시위에 참가한 여학생이 확성기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시리아는 긴 역사를 지니고 있고, 시리아 역사에는 늘 다양성이 공존해 왔습니다. 

이들은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왔으며, 타인을 용서해왔습니다. 

이번 사태는 시리아에 큰 어려움을 가져왔지만, 긴 역사동안 수많은 혼란의 와중에도 높은 문화를 이룩해온 이들이 

어떻게든 극복할거라고 봅니다만 시리아 국민들은 계속 죽어나가고 있는데도 

정작 전쟁의 당사자들과 주변의 국내외 관련 세력들이 너무 복잡하게 얽히고 섥혀 있어서 

이번 전쟁이 빨리 끝날 것 같아 않아 보이니 그저 암울할 따름입니다.


<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모스크: 인류 문명의 긴 역사 동안 수준 높은 문화를 쌓아 온 시리아의 대표적인 모스크 >

 

 

 

 

 

< 참고 >

http://www.bbc.co.uk/mediacentre/proginfo/2013/11/history-of-syria.html (BBC 홈페이지)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227100012&ctcd=C06 (주간조선)

http://blog.naver.com/kcifblog?Redirect=Log&logNo=110157996546 (국제금융센터)

http://terms.naver.com/entry.nhn?cid=767&docId=1522733&mobile&categoryId=2084 (네이버 지식백과 - 시리아)

http://en.wikipedia.org/wiki/Syria (위키백과.영문 - 시리아)

http://en.wikipedia.org/wiki/Syrian_civil_war (위키백과.영문 - 시리아 내전)

http://www.traveldocs.com/index.php?page=about-syria-2 (시리아.영문)




BBC 시리아의 분쟁의 역사 (BBC.This World - A History of Syria, 2013) 감상

ref)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bpvC&articleno=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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