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프가니스탄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 쓰시오.
아프가니스탄 전쟁
소련군이 무자헤딘들에게 고전하다(1979년 ~ 1989년)
1979년 소련이 침공해 일어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미 · 소 냉전시대에 소련이 치른 마지막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여러 가지로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실패한 경우와 유사한 경험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지정학적으로 소련에게 아프가니스탄은 중동 및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통로에 위치한 중요한 곳이어서 그들은 제정 러시아 시대 이래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려 애써왔다. 한편 아프가니스탄은 때로는 소련에 의존하고 때로는 중립정책을 사용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지켜 왔다.
1978년 4월 쿠데타로 집권한 타라키는 친소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그는 혼란 정국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반대세력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서방측 지원 중단과 정치 및 경제 혼란은 국민 불안과 반정부 운동을 점증시키고 그에 따라 타라키 정권은 억압정책을 사용함으로써 악순환은 계속되었다.
9월 타라키를 살해하고 집권한 하피줄라 아민은 '아프가니스탄의 티토'를 자처하면서 소련의 내정간섭을 비난했다. 이때 소련은 아민 정권이 타라키 정권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데다가 만일 분위기가 돌변하여 극단적인 반소 이슬람교정권이 수립된다고 하면 그동안 그들이 아프가니스탄에다 투자한 노력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것을 우려하고 직접 무력행사에 나서게 되었다. 1956년 헝가리, 그리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할 때와 거의 같은 동기였다.
12월 24일 저녁 소련군은 카불 공항에 공수부대를 투하하고 이어서 국경지역에서 6개 보병사단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토록 했다.
공수부대 가운데 KGB 요원들로 구성된 코만도 부대는 아프가니스탄 군복을 입고 침투했다. 그들은 아민을 살해하고 충성스런 친소주의자 카르말을 내세워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토록 했다. 소련군에 동조하지 않는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에 대하여 모두 무장해제 시키고 반군에 대하여는 직접 소탕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후 소련군은 미군이 베트남에서 게릴라들을 소탕하려다 실패한 것과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되었다.
만 9년 4개월 동안 게릴라전에 말려든 소련군 규모는 가장 많은 병력을 투입했을 때는 135,000명에 이르고, 거기에 아프가니스탄 정규군 3만여 명이 가세하여 10만여 명의 반군을 상대로 하여 싸웠다.
소련군은 T-72 전차와 최신형 무장헬기 등을 사용했으나 원시적 장비를 사용하는 게릴라들을 소탕하는 데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게릴라들은 자신들을 '무자헤딘'이라고 불렀다. 이슬람의 자유전사(自由戰士)라는 의미였다. 무자헤딘들은 여러 개 세력으로 난립되어 있으나 종교적으로는 대체로 결속되어 있었다.
무자헤딘들은 공공시설을 파괴하고 정부 요인들과 비밀경찰조직인 KHAD의 끄나풀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소련군에 협력하는 자들에 대하여 테러를 가했다. 그들은 영국제와 중국제 소총을 휴대했으며, 기관총 · 박격포 · 대전차로켓 등을 보유했다. 미국 · 중국 · 파키스탄 등으로부터 받은 원조액수가 연간 6억 달러에 이르렀다. 사실상 그들에 대한 최대의 무기 공급원은 소련군과 정부군이었다. 그들이 보유한 무기의 약 80%가 적으로부터 탈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자헤딘의 가장 큰 강점은 전투의지가 대단히 높고 외세에 대항하여 싸우는 뚜렷한 명분이 있어 국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던 점이었다.
한편 소련군은 게릴라전과 산악전에 대한 경험과 준비부족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주로 유럽에서 정규군끼리 부딪치는 싸움에 맞추어 훈련을 받아온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복잡한 전투 환경에서 요구되는 임기응변 능력과 창의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전투 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사기가 떨어진 소련군 병사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끝없는 게릴라전에 대한 불평불만이 만연되고 전투공포증 또는 알코올 중독환자가 늘어만 갔다. 또한 무기와 탄약을 팔아 마약을 구입하는 자들도 있었으며, 마약중독자가 본국에 귀국하여 범죄소굴에 빠지는 등 사회문제까지 일으켰다.
소련은 결국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은 끝이 없으며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1988년에는 철군의 길을 모색했다. 아무리 현대무기로 무장된 군대도 국민 지지를 받지 못하는 편에 서서 대게릴라전을 수행해서는 승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88년 4월 15일 제네바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소련군은 그해 5월부터 이듬해 2월 15일까지 단계적으로 철군을 함으로써 9년 동안 국력을 낭비하고 체면만 손상시킨 소모전을 종식시킨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 소련군이 무자헤딘들에게 고전하다(1979년 ~ 1989년)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 7. 16.,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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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36074&cid=43073&categoryId=43073
*아래 문제와 같이 볼 것
2. 탈레반 성장과 이슬람주의의 확장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탈레반
1994년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주(州)에서 결성된 무장 이슬람 정치단체로서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한 세력이다.
구분 - 무장 이슬람 정치단체
설립일 - 1994년 10월
설립목적 - 이슬람공화국 건설
주요활동/업무 - 과도정부 수립 및 이슬람공화국 선포, 급진적 이슬람정책 수행
소재지 -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1994년 10월, 2만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에서 결성한 수니파(派) 무장 이슬람 정치조직을 가리킨다. 결성 당시부터 군정세력으로 출발하여, 1994년 아프가니스탄 국토의 80% 정도를 장악하였다. 1995년 초 국방장관 마수드(Massoud)에 의해 조직이 와해될 뻔 하였으나, 1996년 파키스탄에서 군사지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재정지원을 받아, 수도 카불(Kabul)을 점령하고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로써 14년간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내전과 4년 동안의 모자헤딘(Mojahedin:무장 게릴라 조직) 권력투쟁을 종식시켰지만, 이러한 탈레반에 저항하는 북부동맹이 새로 결성되었다.
탈레반은 과도정부인 이슬람공화국을 선포하면서 결속력 있는 세력으로 등장한 후, 아프가니스탄 내 반군 조직을 무장해제시키고 약탈과 강도, 부정 부패를 없애는 데 힘을 쏟는 한편, 일상 상업 활동을 재개함으로써 전통적인 아프가니스탄 가문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내전이 계속되면서 국가 접수(接收)가 어려워지자 지역 지휘관들과 전략적 협정을 체결, 지역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위법 사항과 이에 따른 각종 인권침해를 도외시함으로써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더욱이 이슬람교에 대한 엄격한 해석으로 인해 갈수록 사회 차별이 심해지고, 여학교 폐쇄, 텔레비전 금지, 가혹한 이슬람식 처벌제도 부활, 아동 학대 등 많은 부작용을 낳음으로써 국제사회의 비난을 샀다. 또 2001년 3월에는 군대를 동원해 로켓과 탱크 등으로 아프가니스탄 내 불교 유적과 불상들을 부수는 등 유례 없는 유적 파괴 행위를 공개적으로 일삼기도 하였다.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대폭발테러사건의 배후자인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과 그의 추종 조직인 알 카에다(Al-Queda)를 숨겨둔 채 미국에 인도하지 않음으로써 미국과 동맹국들의 반발을 산 끝에 결국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났다.
같은 해 10월 7일부터 시작된 미군과 영국군의 합동 공격으로 인해 대부분의 공군기지와 지휘본부, 방공망과 방송시설이 파괴되었음에도 여전히 빈 라덴을 인도하지 않고, 계속 항쟁 의지를 밝히면서 성전(聖戰: 지하드)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2001년 11월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고 여러 정파가 참여한 임시정부가 구성되었으며, 탈레반은 파키스탄과의 접경지역으로 도피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탈레반 [Taliban]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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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09232&cid=40942&categoryId=40082
근본주의 - 이슬람주의랑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듯
근본주의는 무엇인가?
미국의 9.11 참사 이후 이슬람 근본(원리)주의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이 가운데 이 용어가 이슬람권 국가에서 존재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주된 관심을 끌었다. 이 용어를 역사적 맥락에서 고찰하거나, 이슬람 부흥주의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이슬람 근본주의란 용어는 현재 이슬람 국가에서 쓰이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근본주의는 20세기 초 미국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이 성서를 근거로 세속화를 막기 위해 사용된 용어"로 알려져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18세기 중엽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모함마드 이븐 알 와합이라는 지도자에 의해 일어난 와하비 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와하비 운동은 무슬림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개혁운동으로 순수한 이슬람으로의 복귀를 주창했다. 이슬람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기 위해 이 용어의 의미를 해결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이란의 입장에서 이슬람 근본주의는 1979년 호메이니의 등장으로 촉발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이슬람권 국가로 확대되었다. 모함마드 이크발의 시와 사상은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의미가 이슬람 급진주의와 혼용되어서는 안 된다. 무슬림들이 근본주의의 의미를 자신들의 입장에서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일부 이슬람 학자들은 근본주의를 몰라이즘(Mollaism)과 동일시하고 있다. 몰라는 이슬람 성직자를 뜻한다. 현재 이란에서는 몰라 계급인 성직자들이 정부를 운용하는데, 탈레반은 국가를 통치하는 데 극단적이고 근본주의적인 행태를 보였다.
언론에서 보도된 탈레반에 대한 의미는 제대로 사용되지 못했다. 탈레반은 사전적 의미로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이나 '종교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 두 가지의 의미에서 탈레반은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이란 뜻으로 한정시켜야 한다. 탈레반은 1994년 정치‧군사적으로는 파키스탄에 의해, 재정적으로는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 의해 지원을 받아 생겨난 세력이다. 탈레반의 인적 자원은 민병대인 이전의 무자헤딘(전사)이 주를 이루고, 파키스탄의 '마드라사'에서 훈련받은 아프간인이 합류하였다.
'마드라사'는 한국에서 예전의 서당에 해당하는 초등학교이다. 서당에서 천자문을 읽으며 유교식 교육을 배우듯이 코란 등의 과목을 배우는 '마드라사'는 이슬람식 교육을 받는 곳이다.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이란 의미로 탈레반이란 단어를 스스로에게 붙인 것이지, 학생 조직과는 관련이 없다. '탈레반'을 마드라사 출신의 이슬람 신학생 조직으로 해석하는 견해는 서구 언론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드라사를 졸업하거나 종교학을 전공하는 일부 학생들이 이 조직에 가담한 사실은 물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탈레반 민병대는 파쉬툰족이다.
이전의 탈레반 정권에 대한 미국의 봉쇄와 제재는 계속되고 있지만 실효성에는 많은 이들이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파쉬토네스탄(파쉬툰족의 나라)의 독립을 꿈꾸었던 탈레반은 미군의 개입으로 북부 동맹에게 권력을 이양함으로써 꿈을 접어야만 했다. 이라크인의 자유와 해방을 기치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에서 미군은 60% 이상의 쉬아파의 존재를 과소평가함으로써 치명적인 난관에 봉착했다. 이라크의 쉬아파는 이란의 쉬아 권력과 친분을 유지하며 지원을 받고 있다.
스탈린은 타직인(이란 민족은 페르시아족과 타직족으로 구분됨)에 대한 정체성을 약화시키기 위해 타직인들을 타지키스탄을 비롯해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키즈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등으로 분리시켜 그들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 했다. 그 결과 타지키스탄 면적의 3배 이상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대략 2천5백만 명 이상의 타직인들이 흩어져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구소련의 붕괴는 분리된 듯 보이는 그들 간에 민족의식과 형제애를 싹틔우고 있다. 19~20세기 제국주의의 분열 정책으로 극도로 민족적 정체성이 약화되었던 페르시아 이슬람권이 서서히 소생하고 있다.
페르시아 이슬람권과 쉬아 이슬람의 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은 그들의 의식 속의 내면적 실체를 찾아냄으로써 우수 문화를 수용하는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데 꼭 필요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근본주의는 무엇인가? (페르시아 문화, 2004. 12. 30., ㈜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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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589&cid=43084&categoryId=43084
3. 알카에다와 테러리즘의 성장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알 카에다 [ Al-Qaeda ]
요약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이 조직한 국제 테러단체.
1979년 소련(현 러시아)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을 때 아랍 의용군으로 참전한 오사마 빈 라덴(1957.3.10~2011.5.2)이 결성한 국제적인 테러 지원조직이다. 1991년 걸프 전쟁이 일어나면서 반미 세력으로 전환한 이 조직은 빈 라덴의 막대한 자금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파키스탄·수단·필리핀·아프가니스탄·방글라데시·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미국·영국·캐나다 등 총 34개국에 달하는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철저한 점조직으로 움직이면서 계속 활동영역을 확장해 비(非)이슬람권 국가에까지 세력을 뻗치는 한편, 1998년에는 이집트의 이슬람원리주의 조직인 지하드와 이슬람교 과격단체들을 한데 묶어 '알 카에다 알 지하드'로 통합하였다.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항하는 국제 이슬람전선'으로 일컬어지며, 조직원은 3,000~5,000명으로 추정되는데, 세계 각지의 산간이나 오지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부 소재지나 활동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주요 목적은 이슬람 국가들의 영향력 확대이며, 이를 위해 다양한 국적의 테러조직과 연결해 3억 달러에 달하는 오사마 빈 라덴의 막대한 자금력을 이용, 각종 테러에 자금을 지원해 왔다.
특히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 맨해튼의 110층짜리 쌍둥이 건물인 세계무역센터와 미국 국방부(펜타곤)에 대한 항공기 납치 자살테러사건의 배후 조종자가 이 조직의 수뇌인 빈 라덴으로 의심받으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 이 테러사건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만 알 자와히리 역시 빈 라덴의 주요 추종자로 알려져 있는데, 미국에서는 이들의 점조직이 개입해 테러범을 조직화하고, 실행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 카에다 [Al-Qaeda] (두산백과)
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16727&cid=40942&categoryId=31600
4. 9.11테러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9·11 사태(2001년)
그때 세계는
2001년 : 체첸 반군의 러시아 오페라극장 진압 사건
2002년 :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
2003년 : 이라크 전쟁 발발
2005년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서거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아침, 사람들은 텔레비전 화면에 비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경악했다. 두 대의 대형 여객기가 뉴욕 맨해튼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충돌하여 거대한 쌍둥이 빌딩이 화염에 휩싸이고 있었다. 1시간 후 높이 100여 층의 빌딩은 마치 거짓말처럼, 거대한 흙먼지와 함께 천천히 위로부터 무너져 내렸다. 같은 시각 버지니아 알링턴 소재 미 국방부 건물에도 여객기 한 대가 충돌하여 아비규환의 혼란이 벌어졌다. 또 다른 여객기 한 대는 펜실베이니아 주 남쪽의 산지에 추락했다. 방향으로 보아 이 여객기는 수도 워싱턴에 있는 백악관이나 국회의사당을 향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이는 미국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적 공격이었다. 60년 전 진주만에서 그랬던 것처럼 완벽한 기습이었고 거의 완벽한 성공이었다. 3천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미국은 순식간에 전쟁의 공포에 빠져 들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사건이 벌어진 시각 부시 대통령은 플로리다 주 한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과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미국에 대해 이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벌였단 말인가?
온 나라가 충격에 빠진 가운데 정부는 신속한 대응에 나섰다. 국가 비상 사태가 선포되고 모든 공항에서 비행기 이착륙이 금지되었다. 의회는 대통령에게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전면 무력 사용을 허가하는 비상 법안을 통과시켰다. 중앙정보부(CIA)는 모든 정보를 총동원하여 이 비극적 사태의 배후를 찾아 나섰다. 항공기 납치범들은 알 카에다라는 한 반미 이슬람 무장단체 단원들이었고,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족 출신의 테러리스트가 조직을 이끌고 모든 일을 계획했음이 밝혀졌다.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비호 아래 그곳에 은거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그의 인도를 요구했고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거부하자 즉각 군사 행동에 나섰다.
10월 7일 폭격기에 의한 공습을 시작으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전면적 군사 작전이 펼쳐졌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힘껏 저항했으나 전 군사력을 동원하다시피 한 미군과 나토군의 공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11월 12일 수도 카불이 미군에 함락되었고, 이후 몇 차례 대규모 전투에서도 미군과 연합군이 승리하여 전쟁은 사실상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미국이 찾던 빈 라덴은 추적을 교묘히 따돌리며 도피를 계속했으나 결국 2011년 5월 2일 파키스탄의 은신처에서 미군 특수 부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미국의 공세는 아프가니스탄과 알 카에다에 그치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테러 공격을 기도하는 모든 세력과 이들을 비호하는 국가들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라크, 이란, 북한을 테러리즘을 지원하는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그중 이라크에 대해서는 2003년에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여 반미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다. 이란과 북한에 대해서도 군사적 공격을 위협하며 그들의 테러리스트 지원과 대규모 살상 무기(WMD) 개발 계획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
국내적으로도 또 다른 테러리스트 공격을 막기 위한 여러 조치들이 시행되었다. 이른바 애국법을 만들어 공항과 항구에서의 검문 검색을 강화하고 반정부 활동에 대한 전면적 감시 체제를 구축했다. 외국인들의 미국 입국과 이민에 대한 제한 조치도 뒤따랐다.
그러나 이 모든 조치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아직 9·11 사태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빈 라덴과 알 카에다를 제거한 것, 이후 다행히 미국에 대한 또 다른 대규모 테러리스트 공격이 없었다고 하는 것을 제외하면,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은 아직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공식적인' 승리 선언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아직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 완전히 발을 빼지 못하고 있다. 이란과 북한은 미국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위험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국내외 여론도 급격히 나빠지고 있을 뿐 아니라 지나치게 공격적인 미국의 태도를 비난하는 여론이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9·11 사태가 몰고 온 정신적 충격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오랜 경기 침체와 국력 쇠퇴로 실의에 빠져 있던 미국인들에게 9·11 사태는 절망적 좌절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10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9·11 사태는 아직도 미국인들의 삶과 생각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화염에 휩싸인 세계무역센터 빌딩.
9·11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고, 그 여파는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9·11 사태는 분명 현대 미국사의 가장 충격적 사건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의 역사적 의미를 지금은 다 알 수가 없다. 자본주의와 미국에 비판적인 사회학자 월러스틴은 "세계무역센터와 함께 미국과 자본주의도 무너져 내렸다."면서 9·11 사건을 자본주의와 미국 패권의 종식을 알리는 하나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문명충돌론》의 저자 새뮤얼 헌팅턴에게 9·11 사건은 본격적인 '문명 충돌'의 시작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그런가 하면 9·11 사건 자체는 비극이지만 오히려 이것이 미국에게는 새로운 패권적 질서 구축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분명한 것은 '문명의 충돌'까지는 아니더라도 9·11 사태는 최소한 앞으로 벌어질 미국과 이슬람 세계의 갈등, 그리고 중동에서의 위험한 사태 발전을 암시한다. 9·11 사태가 수십 년에 걸친 미국의 친이스라엘적 중동 정책에 대한 반발과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미국이 전반적으로 정책을 수정하지 않는 한 앞으로 중동에서는 미국에 도전하는 위험한 소요 사태와 전쟁의 불안한 상황이 조성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이 미국에 대한 또 다른 테러 시도로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또 하나 말할 수 있는 것은 9·11 사태 이후 벌여온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이 결국 패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분명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각국을 이 전쟁에 끌어들이고 이를 통해 미국의 위상과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의 사태 진전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은 그런 능력을 이미 상당 부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한때 세계 경제력과 군사력의 절반을 호령했던 그 미국이 아닌 것이다. 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바로 미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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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70741&cid=43055&categoryId=43055
미국대폭발테러사건
요약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 뉴욕의 110층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에 대한 항공기 동시 다발 자살테러 사건.
뉴욕 기념품
미국대폭발테러사건(9.11테러)과 관련된 기념품. 오사마 빈라덴과 후세인의 얼굴이 그려진 화장실용 두루마리 휴지로 테러리즘에 대한 풍자를 하고 있다.
언제 - 2001년 09월 11일
어디서 - 뉴욕 세계무역센터, 워싱턴 미국 국방부
누가 -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조직인 알 카에다 등 이슬람 테러조직
무엇을 - 세계무역센터 빌딩 및 미국 국방부 건물 폭파
어떻게 - 항공기 납치를 통한 동시 다발 테러
왜 - 미국 주도의 세계평화 저지, 미국인과 유대인에 대한 성전 수행
발생 일자를 따서 '9·11테러사건'이라고도 한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20분 사이에 일어난 항공기 납치 동시 다발 자살테러로 인해 미국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워싱턴의 국방부 청사(펜타곤)가 공격을 받은 대참사를 말한다.
사건은 4대의 민간 항공기를 납치한 이슬람 테러단체에 의해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시간대별 상황은 다음과 같다.
오전 7시 59분 92명의 승객을 태운 아메리칸 항공 소속 AA11편이 보스턴을 출발해 로스앤젤레스를 향해 날아 올랐다. 이어 오전 8시 1분 45명을 태운 유나이티드 항공의 UA93편이 뉴저지주에서 샌프란시스코로, 8시 14분 65명을 태운 유나이티드 항공의 UA175편이 보스턴에서 로스앤젤레스로, 9시 64명을 태운 아메리칸 항공의 AA77편이 워싱턴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각각 향했다.
오전 8시 45분 AA11편이 항로를 바꾸어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과 충돌한 직후인 오전 9시 3분 UA175편이 남쪽 건물과 충돌하였다. 이어 오전 9시 40분 AA77편이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과 충돌하였고, 9시 59분경에는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이 붕괴되었으며, 오전 10시 3분 UA93편이 피츠버그 동남쪽에 추락하였다. 10시 30분경 세계무역센터 북쪽 건물이 완전히 붕괴되고, 이 여파로 인해 오후 5시 20분에 47층짜리 세계무역센터 부속건물인 7호 빌딩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바뀌었고, 세계 경제의 중심부이자 미국 경제의 상징인 뉴욕은 하루아침에 공포의 도가니로 변하고 말았다. 미국의 자존심이 일거에 무너진 것은 차치하고, 이 세기의 대폭발 테러로 인해 90여 개국 2,800∼3,500여 명의 무고한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CNN 방송망을 타고 시시각각으로 사건실황이 전세계에 생중계되면서 세계 역시 경악하였다.
세계경제도 이 동시 다발 테러 앞에서는 전혀 손을 쓰지 못했다. 국제금리가 단숨에 하락하고, 세계 증권시장이 흔들렸다. 미국은 사건 직후 일주일간 증권시장을 열지도 못하였으며, 미국을 오가는 모든 국제 항공선도 차단되었다. 미국인들은 이 사건을 일컬어 '제2의 진주만 공격'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미국 건국 이래 본토의 중심부가 외부의 공격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4대의 항공기에 탑승한 승객 266명 전원 사망, 워싱턴 국방부 청사에서 사망 또는 실종 125명, 세계무역센터에서 사망 또는 실종 2,500~3,000명이 발생하는 등 정확하지는 않지만 인명 피해만도 2,800~3,500명에 달하였다. 경제적 피해는 세계무역센터 건물 가치 11억 달러, 테러 응징을 위한 긴급지출안 400억 달러, 재난극복 연방 원조액 111억 달러 외에 각종 경제활동이나 재산상 피해를 더하면 화폐가치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납치당한 4대의 항공기에는 3~5명의 납치범들이 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미국연방수사국(FBI)의 조사 결과 범인들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출신의 조종사들로 알려졌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 테러리스트인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과 그의 추종 조직인 알 카에다(Al-Qaeda)를 주요 용의자로 간주하고, 그밖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산하의 무장조직인 하마스(HAMAS), 이슬람원리주의 기구인 지하드, 레바논의 헤즈볼라 등 다른 이슬람 테러조직들도 관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항공기가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과 충돌한 직후인 오전 9시 31분, 부시(George W. Bush) 미국 대통령은 이 테러사건을 '미국에 대한 명백한 테러 공격'으로 규정하고, 이어 전국의 정부 건물에 대피령을 내리는 한편, 국제연합·시어스 타워(현 윌리스 타워) 등 주요 건물을 폐쇄하였다. 같은 날 금융시장 폐장 결정을 내린 뒤, 뉴욕과 워싱턴에 해군의 구축함 등 장비를 파견하였다.
9월 12일 테러 개입자들에 대해 사전 경고 없이 보복할 것을 천명하고, 이튿날 부시 대통령은 '이 테러를 21세기 첫 전쟁'으로 규정하였다. 9월 15일 빈 라덴이 숨어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지상군 투입 결정을 내리는 한편, 아프가니스탄의 인접국인 파키스탄을 설득해 영공 개방 등의 약속을 받아내고, 작전명을 '무한 정의 작전'으로 명명한 뒤 보복전쟁에 들어갔다.
같은 해 10월 7일,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영국과 함께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공항과 탈레반 국방부, 잘랄라바드공항, 칸다하르 탈레반 지휘사령부, 헤라트공항 유류저장고, 마자르 이샤리프 탈레반 군장비 집결지, 콘두즈 탈레반 지역군사작전 지휘소 등에 50기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하였고, 알 카에다의 훈련 캠프와 탈레반 정부의 군사시설 등에 엄격히 제한된 선별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제한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미국·영국 연합군은 2001년 10월 9일 아프가니스탄 주변에 350여 기의 항공 전력을 배치하고, 아프가니스탄 영토에서 자유로운 전·폭격기를 이용한 공습과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군을 앞세워 같은 해 11월 20일에는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함락하였다. 이어 다음달 22일 연합군은 반 탈레반 정권인 과도정부를 수립함으로써 탈레반과의 전쟁을 종결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이 전쟁의 목표로 삼았던 빈 라덴과 그의 조직 알 카에다를 뿌리뽑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끝내지 않고 이후 중동으로 눈을 돌려 2003년 3월 20일에는 이라크전쟁을 일으켜 20일 만에 완전 함락시키고 새로운 과도정부를 출범시키는 등 대 테러 전쟁을 계속하였다.
한편, 이 사건에 대해서는 미국의 부시 정권이 벌인 자작극이라는 음모론도 제기되고 있다.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루스 체인지 Loose Change》에서는 펜타곤을 공격한 것이 민간 비행기가 아니라 미사일일 가능성이 높고, 세계무역센터 붕괴 원인은 비행기 충돌 때문이 아니라 미리 장착된 폭탄 때문이며, 비행기 공격을 받지 않은 건물이 2개의 건물이 무너진 지 7시간 뒤에 무너진 점 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며 이 모두가 미국 정부의 치밀하고도 은밀한 계획하에 실행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미국 정부가 유대인 세력과 공모하여 테러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탐지하였음에도 고의로 이를 무시하고 테러를 방조하였다는 설도 있는데, 그 근거로 예기치 않은 테러 장면을 유대인이 장악한 방송사가 실시간으로 촬영하였고, 세계무역센터 임대 비율 20%를 차지하는 유대인 가운데 이 사건으로 사망한 사람은 한 명도 없으며, 사건 직후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한 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음모론 가운데 확실히 규명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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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16566&cid=40942&categoryId=31787
5.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왜 공격했어요?
9·11 테러 직후, 미국 정부는 테러를 일으킨 주범을 오사마 빈라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오사마 빈라덴은 아프가니스탄에 있었는데, 이곳은 과격한 이슬람 단체인 탈레반이 정권을 잡고 있었어요. 부시 미국 대통령은 탈레반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어요. 오사마 빈라덴을 비롯한 알카에다 지도부를 미국에 넘기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부는 이를 거부했어요. 1980년대에 아프가니스탄이 소련과 싸울 때 오사마 빈라덴이 탈레반과 함께 싸워 주었기 때문이에요.
결국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에 쳐들어갔어요. 미군의 공격으로 탈레반 정부는 순식간에 무너졌어요. 오사마 빈라덴은 파키스탄으로 달아났습니다. 미국은 오사마 빈라덴을 체포하지는 못했지만, 아프가니스탄에 미국을 도와주는 정부를 세웠어요. 하지만 탈레반은 여전히 아프가니스탄 곳곳에 남아서 미군에 맞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답니다.
탈레반이 여전히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남부에 근거지를 두고 저항할 수 있는 까닭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민심을 얻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탈레반을 잡으려고 쏜 미군의 미사일은 성능이 워낙 뛰어나 마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피난길에 올랐어요. 미군과 탈레반의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어린이를 비롯한 민간인이 피해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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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아프가니스탄공격
[ 美國─攻擊 ]
요약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대폭발테러사건에 대응해 미국과 동맹국들이 오사마 빈 라덴과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대폭발테러사건의 배후자인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과 그가 조직한 테러조직 알 카에다(Al-Queda)를 보호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을 상대로 미국과 동맹국들이 벌인 전쟁을 말한다.
테러사건 발생 뒤 미국은 즉시 전쟁상태를 선포하고 테러에 대한 장기전을 선언하였다. 이어 배후 조종자로 지목된 라덴을 보호하고 있는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에 라덴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탈레반 정권이 이를 거부하자, 9월 19일 작전명을 '무한정의 작전(operation infinite justice)'으로 명명하고 미국 본토의 전투기 및 전폭기 편대를 걸프 지역으로 발진하였다. 9월 20일 유럽연합(EU)이 미국과 연합전선 구축을 선언하고, 9월 26일 작전명을 '항구적 자유(enduring freedom)'로 변경하였다. 10월 1일 미국 정부는 탈레반과 라덴을 동일시한다고 선포하고, 10월 5일 산악사단 병력 1,000여 명을 우즈베키스탄 등 아프간 주변국에 배치하였다.
10월 8일, 미군과 영국군은 아프간의 수도 카불과 남부 칸다하르, 동북부의 잘랄라바드 등 주요 도시의 군사시설에 대한 공습을 감행, 아프간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이날 공격에는 50기의 토마호크순항미사일, B-1·B-2 등 15대의 폭격기와 25대의 전투기·정찰기·조기경보기, 항공모함·군함·잠수함 등이 동원되었다.
주요 공격 목표는 수도 카불과 탈레반 사령부가 있는 칸다하르, 알 카에다의 훈련 시설이 있는 다룬타, 알 카에다의 기지가 있는 코스트, 탈레반 제4군단 지휘소와 비행장이 있는 헤라트, 탈레반 항공기지가 있는 신단드, 탈레반의 주요 군사시설이 있는 마자르이샤리프 등이었다. 이 공격으로 탈레반의 방공망과 본부·공군기지 등이 거의 파괴되거나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10월 15일에는 미국 공군 특수작전사령부 소속 지상공격기 AC-130을 실전 배치하고, 10월 19일에는 미국 육군 특수부대인 레인저 대원 200여 명이 탈레반과 첫 교전을 함으로써 지상작전에 돌입하였다. 레인저 부대를 포함한 미국과 영국의 특수부대는 정찰 및 공습목표 설정, 탈레반과 알 카에다 지휘부에 대한 직접 공격, 아프간 반군인 북부동맹 지원 및 협력 등의 임무를 위해 투입되었다.
10월 29일 미국과 동맹국들은 공중을 이용한 제한공격을 계속 감행해 탈레반의 군사시설 대부분을 파괴한 뒤, 다음달 18일에는 반 탈레반인 북부동맹군을 앞세워 아프간 국토의 80%를 장악하였다. 이후 탈레반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전쟁은 개시 한 달 만에 종결되었고, 같은 해 12월 22일 아프간에서는 다국적 평화유지군의 경비 속에 과도정부가 출범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치러지는 동안 이웃나라 파키스탄에서는 하루 10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반미시위가 일어나고, 중동국 등 이슬람권의 반발도 계속되었다. 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사이에 심각한 무력 충돌이 일어나고,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는 탄저균 비상사태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프간에서만 150만 명에 달하는 난민이 발생하고, 공중 폭격 당시의 오폭으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함으로써 국제인권단체들의 비난도 잇따랐다.
미국 동맹국은 영국·이탈리아·독일 등 유럽연합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이며, 그 밖에 파키스탄·우즈베키스탄·일본·한국 외에 러시아와 중국도 미국이 주도하는 대테러전쟁을 지지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미국아프가니스탄공격 [美國─攻擊]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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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미국은 왜 이라크를 침공했을까?
오늘날 석유는 여전히 에너지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동차 연료의 소비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석유를 기초로 한 제품들을 사용하고 있다. 신문 잉크에서 페인트 도료까지, 의류에서 화장품까지 다양한 일상용품들의 근본에는 석유가 있다. 우리가 가장 흔하게 접하는 플라스틱 제품들은 모두 석유로 만들어낸 것이다.
석유화학 섬유인 나일론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여전히 면을 비롯한 자연 섬유만으로 살아야 했을 것이며, 유한한 자연 섬유를 놓고 벌이는 전쟁도 지금의 석유 쟁탈전에 비할 바 아니었을 터이다. 다이아몬드를 두고 벌어지는 서아프리카의 학살극이나 후추를 둘러싼 전쟁을 상기해보면 옷감 정도의 필수품이라면 당연히 끔찍한 전쟁을 동반했을 터이다. 그뿐이 아니다. 석유를 원료로 하는 화학 비료가 없었다면 우리의 식탁은 지금처럼 풍성할 수 없을 것이며, 유기화학에 의한 최초의 합성 의약품인 아스피린이 없었다면 질병에 대한 인간의 의학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을지 모른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석유는 에너지원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전체를 장악하는 근본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석유는 현대 사회의 국가 간 근본적인 불평등과 불균형의 문제, 그리고 분쟁을 촉발하는 가장 핵심적인 원인이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만능 자원 석유를 둘러싸고 전쟁은 수도 없이 벌어졌다. 표면상 다른 이유를 내걸었다고 해도 실상은 석유 전쟁이었던 것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었던 가장 최근 벌어진 노골적인 석유 전쟁은 2002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다.
이라크는 1980년대 말까지 미국의 절대적인 우방이었다. 특히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이란과 전쟁을 벌일 때 이라크는 미국의 지원이 없었으면 아마도 전쟁에 크게 패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란 역시 1970년대 말까지 미국의 우방이었다. 부패한 팔레비 왕정이 1979년 혁명에 의해 무너지면서 미국과 이란은 원수로 변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2006)이 이란의 혁명 세력과 갈등하고 전쟁을 시도하자, 미국은 후세인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이라크와의 전쟁을 앞장서서 주장했던 전 국방장관 럼스펠드(Donald H. Rumsfeld, 1932~)는 1983년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 대통령의 특사로 바그다드를 방문했다. 이후 미국은 이라크에게 이란군의 배치 상황을 보여주는 위성사진들을 포함한 군사 정보 및 각종 무기들과 함께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미국이 생화학 무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몇 가지 세균까지 지원했다는 사실이다. 이라크군이 이란군에게 생화학 무기를 사용하자 1986년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이라크를 공개적으로 비난했지만 미국은 모른 척했다.
1987년, 미국은 이라크 석유를 이란의 폭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구축함을 페르시아 만에 보냈는데 이라크 미사일의 오폭을 당하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후세인은 즉시 ‘실수’라며 사과했고, 미국은 37명의 미군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을 만큼 너그럽게 양해했다. 오히려 이란의 유조선들을 폭파하고 초계정들을 공격했다. 1988년에는 미군함이 이란의 여객기를 ‘실수로’ 폭격 290명의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이후 이란은 이라크와의 전쟁을 포기했다.
이런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일이 왜 일어났을까? 이란의 팔레비 왕정을 무너뜨린 혁명 세력은 극렬한 반미 세력이었다. 부패한 왕정의 친미적 행태에 저항한 세력이었으므로 당연했다. 혁명 세력은 이란 내 석유에 대한 미국의 권리를 차단했다. 미국이 이란을 옹호했던 원인이 무효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라크는 세계 제 2위의 석유 매장량을 가진 나라였다. 이란과 대립각을 세우는 이라크는 미국에게는 완벽한 우방의 조건을 갖춘 것이었다.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거물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이 이라크와 각종 계약을 맺기 위해 바그다드를 찾았다. 전쟁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엄청난 피해를 겪은 터여서 전후 복구가 필요한 것은 당연했다. 이때 미국이 내걸었던 투자 조건의 하나가 이라크 석유 산업의 민영화였다.
그러나 나라 경제가 어렵다고 석유 산업을 미국 회사들에게 헐값으로 넘길 수는 없었다. 후세인은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미국의 보복이 곧 뒤따랐다. 이라크에게 수십억 달러를 빌려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1990년부터 이라크의 석유 수출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쿠웨이트가 석유수출국기구의 합의를 깨고 석유 수출을 갑자기 늘린 것이다. 석유 값이 떨어져 큰 손해를 보게 된 이라크를 비롯한 석유 수출국들이 쿠웨이트의 배반을 비난했지만 쿠웨이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들의 협상 제안마저 거부했다. 일련의 과정에 미국의 압박이 개입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후세인은 미국이 원하는 대로 응하지 않았다. 석유 산업을 미국의 회사들에게 넘기지 않음으로써 오늘날의 악연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이라크 석유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관심은 일명 ‘체니 보고서’라고 알려진 「국가 에너지 정책(National Energy Policy)」(2001)에 잘 나타나 있다. 체니(Richard Bruce Cheney, 1941~) 전 부통령은 석유 회사의 최고 경영자를 지낸 사람으로 미국의 에너지 정책을 종합적으로 다듬었는데, 그 보고서는 “에너지 안보를 무역 정책과 대외 정책의 최우선 사항으로 삼을 것”을 권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현재 석유 생산은 30년 전에 비해 39퍼센트나 줄었지만 앞으로 20년간 석유 소비는 33퍼센트나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 아래 장기 전략에 따른 석유 확보가 필수적이라며, “군사 작전을 포함해 이라크에 대해 즉각적인 정책 검토를 수행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참고로 체니 전 부통령만 석유 회사의 중역 출신이 아니다. 부시(George Walker Bush, 1946~) 전 대통령 역시 석유 회사 사장을 지냈고, 라이스(Condoleezza Rice, 1954~) 전 국무장관은 석유 회사 이사를 지냈다. 부시 행정부의 최고위 관리 100명이 석유 산업에 개인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액수가 1억 5천만 달러 이상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세계에서 석유가 가장 많이 묻혀 있는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지만, 석유를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는 아직 미국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매장량은 약 2,640억 배럴, 이라크의 매장량은 약 1,120억 배럴, 미국의 매장량은 약 220억 배럴로 알려져 있는데, 세계에서 석유를 가장 많이 쓰는 나라 역시 미국으로 현재 석유 소비량의 약 60퍼센트를 수입하고 있다.
한편 30년 전에는 미국계 석유 회사들이 세계 석유 시장을 거의 독점했지만 이제는 약 20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졌다. 미국 석유 회사들의 돈벌이에 빨간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는 뜻인데,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후세인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후세인이 지난 1990년대부터 러시아, 프랑스, 중국 등의 석유 회사들과 유전 개발 계약을 맺고 있는데 미국으로서는 이를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라크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석유 매장량을 갖고 있지만, 기술과 장비 부족으로 땅속에 묻혀 있는 석유를 제대로 퍼올리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퍼올린 석유를 유엔의 경제 제재 때문에 제대로 팔지도 못하고 있다. 식량 구입을 위해 연간 120억 달러 정도를 수출하거나, 국경을 접하고 있는 시리아, 요르단, 터키 등을 통해 밀수출로 푼돈을 벌어들이는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유엔의 경제 제재 때문에 선진국들이 이라크의 석유 개발에 착수할 수 없음에도 계약 경쟁은 치열하게 이루어져왔다. 그중 지금까지 가장 앞선 나라가 러시아였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한 석유 회사는 1997년 35억 달러짜리 유전 개발 계약을 따냈으며, 6~7개의 다른 석유 회사들도 좀 더 작은 규모의 유전 개발 계약을 맺었다.
1970년대부터 이라크와 친선 관계를 유지해온 프랑스도 많은 계약을 맺어왔으며 2000년 초까지 새로운 계약을 협상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라크 대신 사우디아라비아와 지난 30여 년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서 석유 수급에 안정을 꾀하고 있었으나, 9·11 이후 사우디아라비아가 알카에다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지원했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점점 관계가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팔레스타인 해방을 지지하면서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등 사실 미국과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없는 정치적 입장이지만, 단지 석유 때문에 우호 관계가 유지되어왔었기 때문에 이 동맹도 불안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미국은 유엔 사찰단이 이라크에서 대량 살상 무기를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후세인을 몰아내고 군정을 실시하거나 미국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정권을 세워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프랑스나 러시아처럼 기존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나라들은 어떠하겠는가? 지금까지의 계약은 무효가 되고 기술과 장비가 앞선 미국의 석유 회사들이 이라크 유전 개발을 장악할 것이 분명한 전쟁을 반대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 나라가 독재자 후세인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석유 때문이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그렇다면 미국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러시아가 이라크 내에서 갖고 있는 이익을 지켜준다는 보장에 서명하고 결국 이라크 침공에 대한 푸틴(Vladimir Putin, 1952~)의 지지를 받아냈다. 양국 외교관들은 이 밀약에 대해 ‘신사협정(gentleman’s agreement)’이 맺어졌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민간인 사망자만 4만 명이 넘는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석유 전쟁과 중동 문제의 저변을 따지자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길게 이라크 전쟁을 논한 이유는 오늘날 석유로 인한 국제 관계가 얼마나 심각하고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유한한 에너지가 지역적 한정성을 가지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석유가 뭐길래’라는 탄식이 나올 만한 대목이다.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 석유는 이러한 위상에 오르게 된 것일까? 이제 인류가 오늘날과 같이 석유를 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게 된 역사를 살펴보자. (아래 링크 타고 가면 석유에 관한 이야기 계속해서 볼 수 있음)
[네이버 지식백과] 미국은 왜 이라크를 침공했을까? (청소년을 위한 미래과학 교과서 - 신재생에너지, 2009. 10. 16., 김영사)
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82558&cid=47340&categoryId=47340
미국과 이라크는 왜싸웠어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842291&cid=47307&categoryId=47307
7. 아랍의 봄의 전개과정과 영향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아랍의 봄[ Arab Spring ]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되어 아랍 중동 국가 및 북아프리카로 확산된 반(反)정부 시위의 통칭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촉발된 유례 없는 반정부 시위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반정부ㆍ민주화 시위는 집권세력의 부패, 빈부 격차, 청년 실업으로 인한 젊은이들의 분노 등이 원인이 됐다. 2010년 말 시작된 튀니지의 반정부 시위는 2011년 1월 재스민혁명으로 번졌고, 이집트는 2월 코사리혁명으로 각각 정권교체에 성공했고, 리비아에서는 10월 무아마르 카다피(Muammar Qaddafi)가 사망함에 따라 42년간 계속된 독재정치가 막을 내렸다. 또한 알리 압둘라 살레(Ali Abdullah Saleh) 예멘 대통령이 11월 23일 권력이양안에 서명함에 따라 33년간 계속돼 온 철권통치가 막을 내렸다.
일부 국가에서 민주화 시위를 통한 혁명이 성공하자, 혁명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반면 2012년 4월 현재 알제리, 바레인, 이란, 요르단, 모로코, 이라크, 쿠웨이트, 모리타니,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소말리아, 수단, 시리아 등 국가에서는 여전히 크고 작은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73120&cid=43667&categoryId=43667
위키 (읽어볼 것)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B%9E%8D%EC%9D%98_%EB%B4%84
8. 다에쉬(IS)의 등장과 확장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이슬람국가
[ Islamic State ]
요약
급진 수니파 무장단체인 이라크-레반트 이슬람국가(ISIL)이 2014년 6월 29일 개명한 단체
약어
IS
전신인 이라크-레반트이슬람국가(ISIL: 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는 이라크와 레반트에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자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여기서 레반트는 시리아를 중심으로 레바논과 요르단, 팔레스타인 등 지중해 동부 연안의 중동 지역을 아우르는 지명이다.
2003년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이라크 하부조직으로 출발한 단체로, 이라크에서 각종 테러활동을 벌이다 2011년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자 거점을 시리아로 옮겼다. 이들은 2013년 시리아 내전 당시 정부군에 대항해 싸우는 반군으로 활동했으나, 2014년 초부터는 다른 반군들과 본격적으로 충돌을 빚어 왔다. 더욱이 ISIL이 반군 지도부 수 명을 납치ㆍ고문ㆍ살인한 것으로 알려지자, 이에 분노한 자유시리아군 등의 반군은 2014년 1월 ISIL이 하루빨리 시리아를 떠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반군으로 활동하며 세력을 급격히 확장한 ISIL은 2014년 6월 이라크 제2의 도시 모술과 인근 유전 지역을 점령하면서부터 엄청난 기세로 확장을 거듭했고, 6월 29일 ISIL에서 이슬람국가(IS)로 개명했다. 이들은 개명 당시 시리아 북부 알레포에서부터 이라크 동부 디얄라 주에 이르는 지역에 이슬람 지도자 칼리프(Caliph)가 통치하는 독립국가를 창설한다고 밝혔다. 또 ISIL의 최고 지도자인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를 칼리프로 추대했다고 발표했다.
시리아의 락까에 본부를 둔 IS의 자금력과 조직 동원력, 군사력은 이전의 다른 무장단체나 테러조직들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협적이다. 이들은 2014년 6월 이라크 모술과 인근 유전 지역을 점령하면서 유전과 댐 등 기반 시설까지 확보한 데다가 수니파 부호들의 막대한 자금 지원으로 역사상 최고 부자 테러단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과거 알카에다 등 다른 테러단체와는 달리 영토를 갖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당초 1만 2000∼2만 명 수준이던 군사력도 2014년 10월을 기준으로 최대 5만 명까지 증가한 것으로 알려지며, 여기에는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영국 등 외국 국적을 가진 지하디스트(이슬람 전사)도 다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IS는 매년 그들의 활동사항을 담은 연례보고서를 발행하고 있는데, 특히 다양한 트위터 계정을 통해 7개 국어로 서방 출신 신병을 모집하고 유튜브에 미국 기자 살해 같은 잔혹한 동영상을 올려 반대세력에 공포감을 심는 등 소셜미디어를 주요 선전무대로 활용하고 있다. IS는 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를 포함해 조직원 전체가 이슬람의 창시자이자 선지자인 무함마드(571~632)를 상징하는 검은색 옷을 입는다.
한편 미국은 2014년 8월 이라크 내 IS에 대한 공격을 단행한 데 이어 9월에는 아랍 5개국과 함께 시리아 내 IS의 근거지 공습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IS 격퇴 전쟁은 이라크와 시리아 두 개 전선으로 확대됐다. 특히 시리아에 대한 공습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ㆍ요르단ㆍ아랍에미리트ㆍ바레인ㆍ카타르 등 5개국의 연합작전으로 진행되면서, IS 격퇴가 신중동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됐다. 그리고 미국은 2014년 10월 15일, IS 격퇴전의 작전명(코드네임)을 내재적 결의(Inherent Resolve)라고 발표했다.
Ref)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212646&cid=43667&categoryId=43667
위키 꼭볼것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A%AC%EB%9E%8C_%EA%B5%AD%EA%B0%80_(%EB%8B%A8%EC%B2%B4)
9. 시리아 사태와 난민문제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이슬람교는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눠진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형식적인 이유는 창시자 무함마드에서 지배자 칼리파로 이어지는 권력 계승 문제인데
실제적인 이유는 다른 사정이 있습니다.
서구유럽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기독교는 처음엔 종교일뿐이였습니다.
그 세력이 권력으로 인정받는데 30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립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수용한 것이죠. 이미 갖춰진 제국에 종교가 들어온 모양새입니다.
이슬람은 기독교보다 약 600년정도 뒤에 탄생하는데
종교적 세력이 바로 군사력를 갖춘 국가가 되고 이후에 제국이 됩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태생지인 아라비아반도가 제국의 변방이었기 때문이죠.
이때가 고대말-중세초 시기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두가지 포인트는
1.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정해지 못한채 죽었다는 것
(종교이기만 했던 기독교는 예수의 후계자가 필요없었고, 후에 필요에 의해 교황 등 체계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슬람은 종교이자 국가였기때문에 후계자가 필요했다.)
2. 아라비아반도와 페르시아지역의 민족 계통이 다르다는 것.
(아라비아반도(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은 셈족 계통 아랍인이고)
(셈족은 아프리카 흑인보다는 약간 덜 검은 아랍흑인 or 아랍황인으로 이해하면될 것이다.)
(페르시아지역은(지금의 이란) 아리아인 계통 파르사족이다.)
(이란 사람들을 보면 아랍반도 중동사람들보다 피부가 희고 백인계열인데 아리아인 계통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제국이 형성되고 그당시 옛 페르시아지역에 세워진 왕조 사산조 페르시아를 공격해 점령한다.
아랍인들이 페르시아인들을 지배하기 시작한 역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무함마드가 죽고 알리 이후에 지금까지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이 시작되는데
지금까지 이어져 1300년 정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를 그의 친구이자 장인인 아부 바르크(1대)로 인정한다.
그 이후의 우마르(2대)-우스만(3대)-알리(4대)도 칼리파로 인정한다.
즉 무함마드의 혈통보다는 이슬람 제국의 유지가 더 중요한 가치인 것이다.
시아파는 1~3대를 부정하고
그나마 혈통적인 문제가 없는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사위인 알리(4대)를 1대 칼리파로 여긴다.
이 혈통 계승문제로 물론 분파가 갈릴수는 있겠지만
아직까지 이토록 정치적으로 크게 대립하는 이유는 오랜시간 피지배층이었던 페르시아인의 후손인
지금의 이란땅의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아랍반도와 페르시아 지역을 지배했던 이슬람 제국들 간단 정리하면
정통 칼리파 시대(632-661) : 1대~4대 칼리파까지를 이르며, 초기 이슬람 제국 건설. 아랍인 중심
우마이야 왕조(661-750) : 칼리파 선출제에서 세습제로 전환. 아랍계-수니파, 페르시아계-시아파 갈등 시작. 아랍계-수니파가 패권 잡음
아바스 왕조(750-1258) : 우마이야 가문 및 아랍인들의 권력 독점에 반발해서 생긴 왕조. 이슬람 문화적 전성기(8-9세기). 수니파.
아바스 왕조 후기에 수니파 시아파간 갈등이 심각해져 각 지역별로 세력이 난립하고, 투르크족까지 중동으로 진입하게 된다.
아랍권은 유일한 시아파 왕조인 파티마 왕조(909-1171)를 제외하면 이후 생성된
아이유브 왕조, 맘루크 왕조, 오스만 투르크 등이 모두 수니파였다.
페르시아권은 셀주크 투르크, 호라즘 왕조, 티무르 제국 등 외부 민족들이 받아들인 수니파의 영향권에 있다가
사파비 왕조(1501-1736)에 이르러 시아파 왕조가 들어서게 되고,
사파비 왕조는 고대 페르시아와 함께 현재 이란의 역사적 뿌리가 된다.
이라크는 아랍반도와 페르시아 지역의 중간 위치이기때문에 가장 종교,정치,인종 갈등이 극명하게 일어나는 곳이다.
(사우디-이란의 중간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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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갑자기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현대에와서 알카에다니 IS니 나타나느냐
그동안은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야 오일머니로 경제력이 확보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울려고 하는것이다.
IS는 수니파 극단주의 이념인 와하비즘(이슬람 극단주의)을 사상으로 삼고 있다.
당연하게도 수니파는 이슬람제국의 주도 세력이었다.
수니파의 와하비즘은 종교적 이념을 넘어서 강력한 이슬람 제국을 지향한다.
이슬람 제국이 가장 강성했던 중세초 (지금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서구와 경쟁하던 시절)를 그리워 할 것이다.
아랍-이슬람제국은 (630~1258) 꽤 오랜기간 전성기를 구가한다.(칼리파-우마이야-아바스)
몽골 제국의 공격으로 당시 이란 지역의 호라즘 왕조, 아랍 지역의 아바스 왕조가 멸망한다.
당시 이슬람 세력 최후의 보루였던 북아프리카 지역의 맘루크 왕조가 몽골 제국의 공격을 막아낸다.
몽골 제국(일 칸국) 멸망 이후 중동은 아랍 지역(맘루크), 아나톨리아 반도(오스만), 이란 지역(티무르) 등으로 세력이 나눠진다.
이후 중동의 패권을 잡은건 오스만 제국이다.
투르크-이슬람 세력인 오스만제국은 중세부터 근대초까지 강력한 제국을 형성해 전성기를 구가한다. (1299~1922)
이란의 사파비 왕조(1501~1736)는 시아파 왕조로 당시 수니파였던 오스만 투르크가 세력을 넓히는 것을 막아낸다.
중동, 아나톨리아반도, 발칸까지 차지했던 오스만 제국은 근대 서구유럽과의 파워싸움에서 밀리기 시작한다.
마지막 승부수였던 세계1차대전에서 오스만 투르크는 연합국에게 항복. 제국은 분할된다.
이후에 이슬람 세력은 명실상부 서구세력 아래에 놓이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후엔 유럽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미국의 영향력이 강해진다.
이후에 이슬람권의 사상은 서구를 따르려는 세속주의와 과거로 돌아가려는 이슬람 주의가 나타난다.
(이러한 이슬람 주의 중에 극단을 띄는것이 원리주의, 와하비즘 등이다.)
세계대전이후에 이러한 현상은 현대의 터키를 비롯해 중동국가들에게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미국은 중동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당시 라이벌이었던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을 경계하기위해
와하비즘을 지원하기도한다.
그당시 미국입장에서 악의 축인 소련-공산주의를 막기위해 지금의 악의 축인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을 키워준 꼴이다.
아무튼 이러한 역사적인 과정에서
이슬람이 서구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이후 중세시절의 영광을 꿈꾸는 수니파 극단주의자들이
오일을 통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패권싸움을 해보겠다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던 짓은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기독교는 신교와 구교의 종교전쟁을 끝으로 종교를 걸고 전쟁을 하진 않는다.
사실상 같은 문화권끼리 전쟁이기때문에 더 이상 종교적 명분을 내세울 필요도 없었고
그래서 현대에는 자원-독립-이념 등을 명분으로 싸워왔다.
그러나 이슬람은 여전히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우고있다.
그러나 무엇을 명분으로 내세우던 그 밑바탕에는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권력를 쥐어보겠다는 패권의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모든 전쟁이 그래왔듯이
아둔한 민중들은 또 지도자들의 명분 농간에 놀아나는 꼴이다.
이해하기 쉽죠?
http://blog.naver.com/ragera/220251286731
http://blog.naver.com/ragera/220491567084
10. 중동 평화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의견을 말해보시오.
중동평화제안
1982년 9월 1일 미국대통령 레이건이 연설에서 밝힌 중동의 포괄적인 평화에 대한 새 제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이스라엘의 점령지로부터의 철수 ② 점령지에서의 입식지(入植地) 건설의 즉시 중지 ③ 예루살렘의 통일의 유지와 교섭에 의한 그 최종적 지위의 결정 ④ 요르단강서안과 가자지구의 팔레스티나인 주민에게 자치를 허용하고,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자유선거의 실시 ⑤ 요르단강 서안 및 가자지구에 팔레스티나 국가가 수립되어야 하며, 이 두 지구를 이스라엘이 합병 또는 영속적으로 지배하는 것 어느 쪽도 미국은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 ⑥ 두 지구에는 요르단과 연합한 팔레스티나 자치정부가 수립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 등이다. 이것은 형식상 70년대의 미국의 중동평화계획, 특히 캠프데이비드협정과의 합치성(合致性)을 유지하면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베이루트 퇴거(退去)라는 새 정세에 즉응하여, 조정자(調停者)로서의 이스라엘의 행동에 엄격한 제한을 가하고, 아랍 여러 나라를 교섭에 끌어들이려는 것으로, 요르단의 ‘연합왕국구상(聯合王國構想)’이 되살아났다. 이스라엘의 M.베긴 정부는 이 제안을 전면 거부하였으나, 야당인 이스라엘 노동당은 환영하였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3500&cid=40942&categoryId=31657
중동은 이슬람 vs 세속주의 vs 군부주의
종교적 이념 수니 vs 시아
외세 미국 vs 러시아
여러 복합적인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국제 정세를 보더라도 세계 외교 문제란 것은 최고 통치 기관이 없기 때문에 (만약 국가 틀 안에서 범죄가 일어나면 국가에게 책임과 배상문제 등을 물을 수 있다.) 서로의 이득이 되거나 손해가 있지 않으면 이러나지 않게 되어있다. 이러한 역사는 반복 되었고(로마부터 냉전 시대까지 패권싸움) 우리는 그 가운데 중동 이라는 커다란 문제에 맡닥드려 있다.
요즘 연말 시상식을 보면 항상 앞에 나오는 사람들은 감사한다 아름답다 뭐 이런 형이상적이고 인도적의 적인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실상 국가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보면 정말 인간적인 것이 뭐인지도 모를만한 결과들이 일어난다(여기서 인간적이란 것은 물질 만능주의를 말하는 것인가 형이상학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건가 두가지 측면에서)
평화를 이루게 되는 방식은 여러 가지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한쪽이 우세하게 승리 또는 중동의 힘이 다른 곳으로 집중된다면? (ex 3s sports sex screen 정책이든?)
ex)
하지만 1930년대 나찌는 유대인이라는 타자를 설정함으로써 독일 내부의 불만과 문제를 외부로 전가하고, 비유대 독일인들을 나찌의 선동 아래 결속시켰다. 희생양을 의미하는 scapegoat는 고대의 제사에서 사람의 죄를 속죄하는 댓가의제물로 양이 바쳐졌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희생양”은 여전히 존재한다. 즉, 정부가 가상의 적을 설정하여 국가 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림으로서 ‘내부’의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하는 바로 그것이다. 나찌가 그랬다.
http://www.bostonkorea.com/news.php?code=cc&mode=view&num=22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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