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에즈 위기와 2차 중동전쟁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2. 3차 4차 중동전쟁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3.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4. 알제리 독립 과정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5. 이라크의 후세인과 바트당, 시리아 아사드, 리비아 카디피에 대해서 군부 독재에 대해 정리하시오.
6. 터키, 이집트, 레바논 등의 세속주의 국가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7. 이란의 호메이니와 이슬람 혁명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8. 사우디 아라비아, 아랍 에미리트 등 왕정 체제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9. 이란,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10. 걸프전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1. 수에즈 위기와 2차 중동전쟁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제2차 중동 전쟁은 수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이집트와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군이 국경을 넘어 시나이반도를 침공하여 시작되었으며, 1957년 5월까지 계속되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에서 이겼으나 결과적으로 수에즈 운하를 잃게 되었다.
cf)수에즈 위기와 미소 양극체제의 본격화 http://aceferr.tistory.com/25
https://namu.wiki/w/%EC%88%98%EC%97%90%EC%A6%88%20%EC%A0%84%EC%9F%81
Suez War
제2차 중동전쟁, 시나이 전쟁이라고도 한다. 이집트에서는 삼국 침략이라 부른다. 전쟁기간은 1956년 10월 29일 ~ 1957년 3월.
20세기 초까지 세계를 호령한 양대강국 대영제국과 프랑스가 이제는 새로이 떠오른 미합중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장기말 신세로 전락한 것을 전세계에 인증해버린 전쟁이기도 하다.
배경
1956년 7월 26일,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양팔외교전략을 취했다. 미국과 서유럽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아스완 댐을 짓고, 소련과 무기 협정을 맺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도입하려 했던 것. 하지만 동유럽산 무기 도입 때문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측은 아스완 댐 건설비용 지원을 거부했고, 이에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한다. 이 수에즈 운하의 중요성은 항목 참조.
제2차 중동 전쟁은 수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이집트와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군이 국경을 넘어 시나이반도를 침공하여 시작되었으며, 1957년 5월까지 계속되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에서 이겼으나 결과적으로 수에즈 운하를 잃게 되었다.
배경
1956년 7월 26일,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양팔외교전략을 취했다. 미국과 서유럽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아스완 댐을 짓고, 소련과 무기 협정을 맺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도입하려 했던 것. 하지만 동유럽산 무기 도입 때문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측은 아스완 댐 건설비용 지원을 거부했고, 이에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한다.
친소 노선을 펼치며 원래 자신들의 것이나 마찬가지던 수에즈 운하를 집어삼킨 이집트에 영국과 프랑스는 크게 반발하였고, 이스라엘 역시 자신들의 선박이 수에즈 운하 통과를 금지당하는데 크게 격분.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군사행동을 결의하였으며 이스라엘 역시 동맹으로 참가하게 된다.
사실 비단 수에즈 운하만이 이번 전쟁의 원인이 아니었다. 영국의 앤서니 이든 정권은 이라크에서 값싸게 석유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나세르가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나세르는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의, 범아랍주의를 주창하며 이라크에서 영국의 입김을 제거하려 들었고 영국은 이에 열받고 있었다. 프랑스의 기 몰레 정권 역시 나세르 때문에 환장할 지경이었는데 당시 한창 진행 중이던 알제리 전쟁에 나세르가 개입하여 반프랑스 게릴라들을 지원하고 있었고 프랑스는 이집트를 타격할 준비를 하는 한편 이스라엘에 프랑스제 최신 병기를 지원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나름대로 고민이 컸는데 당시 이스라엘은 호전적인 나세르가 선제공격을 해올 것이라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었고 당시 가자지구에서 양측간 계속된 제한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전과가 훨씬 크긴 했어도 이스라엘에 지속적으로 타격을 주는 팔레스타인 민족 게릴라인 페다이가 나세르의 지원을 받아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들 페다이에 의해 이스라엘의 한 키부츠 지도자인 로이 로스버그가 살해되는 일이 벌어지자 모셰 다얀은 대국민연설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투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정당한 싸움을 하는 저들이 어중간한 대응으론 절대로 우리를 모두 죽이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테니 유대인들이 살기 위해서는 외세의 간교한 평화협상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면서 투지를 불태웠다.
이집트에서는 1953년 파로크 국왕이 축출되고, 이듬해 1954년에 쿠데타 실세였던 낫세르(나세르)가 집권.(낫세리즘)
낫세르는 이집트를 군사/경제적으로 성장시켜 북아프리카~중동 지역의 맹주가 되고자 함.
당시 이집트가 맹주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현안들을 해결해야만 함.
① 이집트 자체의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 : 1954년 영국으로부터 수에즈에서의 영국군 철수 약속
② 북아프리카~아랍 지역에서의 제국주의 청산 : 프랑스 치하 알제리의 알제리민족해방전선 지지
③ 이스라엘 견제 : 팔레스타인 난민 수용, 수에즈 운하에서 이스라엘 선박 통행 금지
이 세가지가 이집트가 맞닥뜨린 임무였고, 낫세르는는 하나하나 해결해나가.
먼저 낫세르는 1955년 9월, 흐루시초프 소련과 군사원조조약을 체결하고, 동시에 미국에게도 경제적 원조를 구해.
무려 7천만 달러라는 거금을 미소 두 진영에 교묘하게 기대어 뜯어냄
2. 3차 4차 중동전쟁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제3차 중동 전쟁(第3次 中東 戰爭)은 1967년 6월 5일부터 6월 10일까지 발발한 아랍 연맹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이다. 이스라엘 측에서는 6일 전쟁(六日戰爭), 아랍 세계 측에서는 6월 전쟁(六月戰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수에즈 전쟁 이후의 중동 분쟁은 1964년 5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결성되어 아랍 국가들이 그 대표권을 승인함으로써 새로운 양상으로 확대된다. PLO는 그 헌장에서 이스라엘 말살과 팔레스타인 국가 건국이라는 '팔레스타인 대의(大義)'를 규정, 이집트·시리아 등 아랍 국가의 지원하에 1950년대부터 활동해 왔던 알파타(Al-Fatah)와 팔레스타인 해방군(PLA) 등의 무장조직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무차별 테러 공격을 자행했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PLO의 테러에 대한 응징과 아랍 국가의 공격 기도에 대한 자위를 명분으로 항공기에 의한 공중기습공격과 시나이 반도에 대한 대공세를 전개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당시 이스라엘이 국내의 경제적 위기를 외부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돌파구를 찾고자 한 저의가 깔려 있었다고 지적된다.
전쟁은 시리아·요르단으로 확대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예정된 계획대로 승승장구, 개전 4일 만에 시나이 반도, 요르단 강 서안 지구, 골란 고원 등을 점령하였다. 6월 6일 국제 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정전 결의안을 양측이 수락함으로써 6월 10일 정전이 성립되었다.
욤 키푸르 전쟁, 라마단 전쟁 또는 10월 전쟁(히브리어: מלחמת יום הכיפורים/מלחמת יום כיפור, 아랍어: حرب أكتوبر/حرب تشرين) 또는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은 1973년 10월 6일부터 10월 25일까지 일어났던 이스라엘과 아랍 연합군(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됨)간의 전쟁이다. 제4차 중동 전쟁이라고도 한다.
전쟁은 욤 키푸르(유대교의 속죄일) 때 이집트군과 시리아군이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을 기습하여 시작되었다. 이 곳은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에 점령된 지역이다.[1]
아랍측은 철저한 보안으로 전략적인 기습을 성공시켰으며 우수한 소련제 무기를 사용하여 서전에서 수에즈 운하의 이스라엘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전진에 성공했으며 골란고원에서도 우세한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동원 병력의 증원된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아랍측이 밀리게 되고 이집트와 시리아의 수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미, 소 양 강대국의 제안으로 휴전 상태에 이르게 되었지만 후에 제1차 오일 쇼크를 불러오게 된다.
중동 전쟁(아랍어: الصراع العربي الإسرائيلي)은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 세계 국가 사이에 벌어진 여러 차례의 전쟁을 말한다.
목차 [숨기기]
1 역사
1.1 제1차 중동 전쟁 (1948년)
1.2 제2차 중동 전쟁 (1956년)
1.3 제3차 중동 전쟁 (1967년)
1.4 제4차 중동 전쟁 (1973년)
역사[편집]
중동 지역 분쟁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 석유 자원을 둘러싼 강대국의 개입, 쿠르드족 문제, 이슬람교 내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 등으로 인해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 중 중동 전쟁은 이스라엘 건국이 원인이 되어, 이스라엘 건국을 막으려던 1차 중동 전쟁 이후 모두 4차례의 큰 전쟁을 치렀으나, 번번이 이스라엘의 승리로 전쟁은 끝났고, 이스라엘은 건국 당시보다 더 확장된 영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의 여파로 1970년대부터 세계는 이슬람계 테러 집단의 계속되는 테러를 겪게 되었으며, 전쟁이 끝났어도 평화는 정착되지 않아 아직도 중동은 불안한 정세 속에 있다.
제1차 중동 전쟁 (1948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제1차 중동 전쟁입니다.
1차 중동 전쟁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이로 인한 팔레스타인 문제로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 간에 벌어졌다. 5월 16일에 이집트 전투기들이 이스라엘을 폭격했고 전 아랍이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5개국 아랍 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이에 이스라엘 민간인들이 부족한 무기들로 싸웠고 20일 넘게 일어난 전투 끝에 결국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지켜내 1948년 6월 11일 스웨덴의 중재로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 미국의 지원으로 현대적인 전투 군대로 변한 이스라엘군은 모셰 다얀 장군의 지휘 아래 이집트 카이로, 요르단 암만,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폭격해 승리를 거두면서 1949년 2월에 평화 조약 조인으로 제1차 중동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전쟁을 이스라엘 독립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제2차 중동 전쟁 (1956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제2차 중동 전쟁입니다.
"수에즈 위기"라고도 한다. 1952년 7월에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을 쫓아내고 대통령이 되었다. 나세르는 소련과 친선 관계를 유지했고 미국과 영국이 아스완 댐 건설 지원 요청을 거절하자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하며 수에즈 운하를 점령해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과 프랑스가 반발해 공군을 동원해 수에즈를 폭격했고 이스라엘도 동맹을 맺고 이집트 시나이 반도를 침공했다. 하지만 이 전쟁이 자칫 세계 대전으로 번질 위험이 있어서 미국과 소련이 압력을 가했고 유엔 총회가 삼국 군대가 철수하면서 끝이 났다. 아랍권에서는 "삼국 침략"이라고도 부른다.
제3차 중동 전쟁 (1967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제3차 중동 전쟁입니다.
제2차 중동전쟁 후 1964년경부터 아랍 게릴라의 활동이 시작되어, 게릴라의 기지가 된 시리아에 대해 이스라엘은 1967년 4월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해 붕괴에 직면한 아랍의 결속강화를 이스라엘과의 대결에서 회복하려는 대통령 나세르는 대군을 시나이반도에 투입, 유엔긴급군의 철수를 요청하고 아카바만(灣)의 봉쇄를 선언하였다. 6월 5일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전투가 개시되었고, 전란은 시리아 ·요르단으로 확대, 전면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스라엘은 6월 5일에 이스라엘 공군기를 전 출동해 이집트 공군기지를 맹폭격하여 170분에 걸친 폭격 끝에 이집트 전투기 300 대를 파괴했고 6월 6일에는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전투기 416대를 파괴해 아랍측 공군력을 괴멸시킨 이스라엘군은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4일 만에 시나이반도를 점령하였으며, 요르단강 서안(西岸)지역, 시리아 국경의 골란고원을 공략하였다. 국제 연합 안전보장 이사회는 6월 6일 즉시 정전을 결의하였고, 쌍방의 수락에 의해 6월 9일 정전이 실현되었다. 또한 안전보장이사회는 그해 11월 중동분쟁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결의 242호를 채택하였다
제4차 중동 전쟁 (1973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욤 키푸르 전쟁입니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의 기습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됐다. 이 날은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축제일인 욤키푸르(사죄의 날) 이었다.많은 병사들이 이날때문에 휴가를 떠난 이때 이집트군의 병력은 75만, 무기들은 탱크 3,200대, 소련제 미사일(SA-6) 까지 총동원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병력은 이집트군의 3분의 1도 안 됐고 무기들도 이집트군의 절반도 안 됐다. 개전 48시간 만에 이스라엘은 17개 여단이 전멸되었다.시리아 역시 소련제 무기를 앞세우며 이스라엘 영내로 진격했다.이집트와 시리아의 승리가 코앞이었으나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대적 지원을 해주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이 35억 달러를 아랍국에, 미국이 22억 달러를 이스라엘에 쏟아부었다. 미국은 30일간 포위됐던 이스라엘에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무려 5,566번의 비행 수송작전을 펼쳤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반격에 나섰고 비교적 허약한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집중포격했다. 골란 고원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시리아 군 탱크 867대, 차량 3,000대 이상을 파괴했다. 욤키푸르에 일어난 전쟁이라서 욤키푸르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1. 제 1차 중동전쟁
제 1차 중동전쟁은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한 바로 다음날 시작되었습니다. 존재 자체를 용납 못한다는 거죠!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를 비롯한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침공했습니다.
전쟁 초반에는 병력으로 밀어붙인 아랍 국가들이 이기는 듯 했습니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부터 아랍국가는 자신만만했고, 사람들도 당연히 아랍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러나 이스라엘이 외국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는 변수가 있었죠!! 그러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949년 1월 7일에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전쟁이 끝났고 이스라엘은 서부 팔레스타인 지역의 80%를 차지하는 등 영토까지 확장한 셈이 됩니다. (아래 지도는 전쟁 후 영토 변화를 나타내는데요, 붉은 색 부분이 이스라엘이 점령한 영토를 나타냅니다)
외국의 지원만 없었으면 아랍 국가들의 뜻대로 됐을텐데요. 이로써 유태인에 대한 아랍인의 증오는 더 커집니다.
2. 제 2차 중동전쟁
1956년 7월 26일자로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다고 선언하면서 영국·프랑스와 이집트의 국제분쟁이 발발했습니다.
(탈식민지화 시대에 국유화가 당연시되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또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홍해로 진출하는 통로인 시나이반도 옆 티란 해협을 봉쇄했습니다.
영국·프랑스와 함께 이스라엘은 동맹을 맺고 이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죠.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요충지를 점령, 영국·프랑스는 수에즈운하를 점령하게 됩니다.
그나마 미국과 소련과 국제연합의 개입으로 3국은 물러났고 시나이 반도에는 국제연합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게 됩니다.
비록 미국과 소련의 압력에 의해 철수해야 했긴 하지만 제 2차 중동전쟁도 이스라엘이 승리한 전쟁이죠.
(사실 중동전쟁 모두 아랍 국가의 패배로 끝납니다)
3. 제 3차 중동전쟁
이스라엘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를 계속 보였으나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하나의 전쟁 원인으로 작용했겠죠.
제 3차 중동전쟁은 6일 전쟁으로 불립니다. 1967년 6월 5일에 시작하여 6월 10일에 끝났거든요.
전쟁의 발단은 2차 때와 비슷합니다. 이집트가 또 티란해협을 봉쇄해서 이스라엘의 길목을 막았고
동시에 시나이반도에서 국제연합 평화유지군을 축출해버린 데서 전쟁이 터지게 되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당시 시리아와 국지전을 치르던 이스라엘이 비무장지대였던 골란고원에 군을 주둔시키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심각해졌고, 이를 계기로 설립된 아랍연합군과 이스라엘 간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6일만에 끝난 전쟁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어느 때보다도 많은 영토를 점령하게 됩니다. 영토가 4배나 확장되었다니 말 다했죠..!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지역, 골란고원, 그리고 시나이 반도의 대부분을 점령하는데요,
어딘지 정확히는 모르더라도 뉴스에서 종종 보도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지요(썩 좋지 않은 뉴스이긴 하지만요..)
이 때 점령지는 지금까지도 주요 논의점으로 남아있고, 3차 중동전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는 더더욱 복잡한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위 지도 범례에 나와 있는 두 노란색의 차이를 구별하기가 참 힘드네요..--;;
빨간 줄로 쳐있는 지역이 기존 이스라엘이였고
나머지 약~~간 어두운듯한(해상도 좋은 모니터로;;;) 지역이 새로 점령한 지역입니다. 시나이 반도, 골란고원 글자가 보이지요.
연달아 전쟁에서 패배한 아랍 국가들의 상황은 말이 아닙니다.
그동안 아랍세계의 맹주였던 이집트는 콧대가 꺾이게 되었고 이집트의 사회, 경제까지도 혼란에 휩싸이게 되죠.
한편 아랍연합은 이스라엘 견제를 위한 대대적인 결의를 합니다.
“이스라엘과 협상하지 않고, 승인하지않고, 평화를 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아랍국가를 단결하게 한 셈입니다.(여기서 생각나는 찰스틸리??????!!)
4. 제 4차 중동전쟁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도 불립니다. 사실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 더 많이 불립니다 특히 외신에서!!
제 4차 중동전쟁은 이집트가 대통령이 바뀌면서 위상 회복을 목표로 1973년 10월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4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영토를 부분적으로나마 회복해서 떨어진 권위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데서 지금까지의 전쟁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4차까지....... 아랍세계는 4전 4패를 경험합니다. 역시 다른 전쟁들과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아랍진영이 우세를 보이다가 결국은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뒷심이 있다기 보다는 외국(특히 미국)의 지원이 가장 큰 이유가 되겠죠.
아랍권이 패배하자 OPEC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석유 가격을 올리고 수출을 전면적으로 금지해 그 유명한!! 제 1차 석유파동을 불러옵니다.
3.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지중해 동쪽 연안 국가인 이스라엘은 지구 상에 유일한 유대인의 국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영토는 아랍인들이 살던 땅을 빼앗은 것입니다. 아랍인들은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팔레스타인이라 부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한 줄로 요약하면 같은 땅을 주고 자신의 영유권과 통치권을 주장하는 두 민족의 다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땅의 주인이 원래 자신이라는 양측의 주장 모두 역사적 근원을 갖고 있고, 둘 다 일리가 있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려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결국 이 문제는 힘이 센 쪽이 이기는 폭력으로 비화했는데, 1차대전 이전 오스만제국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이 나라를 세우고자 영국 정부를 압박했습니다. 아랍인들의 반발과 양쪽 모두에게 영토를 분배하려던 UN의 계획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현재 이스라엘과 이웃들의 국경선은 대체로 1948년과 1967년 일어났던 중동 전쟁의 결과라고 보면 됩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이라 하면 크게 이스라엘 내 두 지역을 합쳐 일컫는 말입니다. 우선 요르단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요르단강 서안(West Bank)은 팔레스타인이 명목상 통치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고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은 이곳에 끊임없이 정착민을 이주시키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서서히 내쫓아 왔는데, 정착민들이 새로 터전을 잡을 때마다 이곳은 이스라엘군과 경비병력의 보호를 받습니다. 이스라엘 남서쪽, 이집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가자지구(Gaza Strip)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이곳은 이슬람 원리주의 정당이자 군대 조직까지 갖춘 하마스(Hamas)가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은 지상군을 가자지구에 상주시키지 않고 있지만, 가자지구를 오가는 모든 물자를 효과적으로 차단하며 이곳을 봉쇄하고 있습니다. 지난 4월, 노선 차이로 좀처럼 손을 잡지 않던 하마스와 요르단강 서안의 파타(Fatah)가 2007년 이후 처음으로 단일 정부 구상을 논의하자 이스라엘이 즉각 이를 가로막고 나서기도 했습니다.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끝내고 평화와 공존으로 나아갈 방안이라는 평가를 받는 해법입니다. 현재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대부분을 영토로 하는 팔레스타인을 새로운 독립국으로 인정해주고, 나머지 영토는 이스라엘 땅으로 하여 두 민족이 공존을 도모하는 것이죠. 아랍 민족이 살고 있던 땅을 영국이 식민지로 경영하던 곳에 원주민을 쫓아내고 세운 나라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영구적인 평화 정착안으로서 두 국가 해법은 사실상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부터 있던 셈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를 어떻게 실행할지를 두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단 한 번도 실질적인 합의에 이른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한 국가 해법(One-state Solution)은 둘 중 하나의 정부가 상대방을 함께 다스리는 것으로 평화적인 공존과는 거리가 먼 해법으로 평가됩니다.
http://newspeppermint.com/2014/07/14/israel_palestine-1/
4. 알제리 독립 과정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1956년 2월13일, 프랑스의 신임 총리 몰레가 아프리카에 있는 식민지 알제리를 방문했다. 그러자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반대하는 알제리 국민들이 일제히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는 수도 알제에서 몰레 총리의 차량을 막고 알제리의 독립을 요구했다. 이렇게 시작된 알제리 국민들의 독립운동은 7년 여 동안 계속됐고 1962년 7월 드디어 독립을 이뤘다.
[1956년 2월13일] 알제리 독립 시위
알제리는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의 나라로 16세기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았고 1826년에 프랑스의 식민지로 넘어갔다. 1962년 물러나기까지 135년 동안 알제리를 식민통치했다. 프랑스는 1830년 처음 알제리를 침공한 이래, 알제리를 프랑스의 일부로 편입시켰으나 현지 주민들에게는 참정권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프랑스는 전통적 부족 사회를 해체하고 주민들을 새로운 행정 단위로 몰아넣었는데, 이는 부족 소유의 토지를 강탈하기 위해서였다.
본격적인 알제리 독립투쟁이 벌어진 것은 1930년대부터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알제리에서도 피어오르기 시작한 아랍 민족주의는 1945년 이후에 더욱 고조되었다. 그러자 프랑스는 1945년 5월8일 2차 대전의 승전을 축하하면서 동시에 알제리 독립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세티프 학살’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알제리인 1만여 명(알제리 측 추산으로는 4만 명이 넘는다)이 살해당했다. 이는 알제리 독립투쟁의 방향을 게릴라·테러 투쟁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54년 11월1일 자유민족전선(FLN)의 주도로 최초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날 3,000여 민족해방군 전사들이 30곳이 넘는 프랑스 병영, 초소, 경찰서 등을 타격했다. 프랑스 본국에서는 당시 이들을 지지하는 사회당·공산당과 알제리가 계속 프랑스 영토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파 정당들의 의견충돌을 빚고 있었다.
그리고 1956년 2월13일 프랑스의 신임 총리 몰레가 아프리카에 있는 식민지 알제리를 방문,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반대하는 알제리 국민들이 일제히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는 수도 알제에서 몰레 총리의 차량을 막고 알제리의 독립을 요구했다. 이는 영화 <알제리 전투>에서 잘 묘사하듯 수천 건의 도심 테러와 파업이 줄을 이었다. 1958년 은퇴했던 샤를 드골 장군이 알제리 사태를 해결하고 프랑스 정부를 진정시키기 위해 정계로 복귀했다. 드골은 알제리의 독립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에비앙에서 FLN과 협상을 벌였다. 이후 알제리는 독립운동을 계속한 끝에 1962년 7월5일 ‘알제리 민주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드디어 독립을 이룬다. 125만 명 이상의 프랑스 시민이 알제리를 떠나 프랑스 본토로 향하는 동안 새로이 수립된 알제리 정부는 프랑스 측에 협력하거나 가담한 알제리 국민들에 대한 보복을 자행했다.
알제리는 8년의 전쟁, 50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 프랑스 당국의 고문과 강간으로 인한 치유할 수 없는 고통을 값비싼 대가로 치루면서 인류 전체를 위해 식민지배라는 역사의 막을 끌어내렸다.
5. 이라크의 후세인과 바트당, 시리아 아사드, 리비아 카디피에 대해서 군부 독재에 대해 정리하시오.
후세인
https://namu.wiki/w/%EC%82%AC%EB%8B%B4%20%ED%9B%84%EC%84%B8%EC%9D%B8
6. 터키, 이집트, 레바논 등의 세속주의 국가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세속주의(世俗主義, 영어: secularism)는 기구나 관습들이 종교나 종교적 믿음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세속주의는 종교의 자유를 주장함과 동시에 믿음에 관한 것들로부터 중립적인 입장에서 국가에 의한 종교적 강요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할 수 있고, 종교에 대해 국가적인 특권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사상을 의미한다. 즉, 인간 활동이나 정치적인 의사결정이 종교에 의해 간섭받기보다는 객관적인 증거와 사실에 기반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세속주의이다.
세속주의 반대 세력은 보통 종교 지도자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속주의가 무종교 법서사주의를 은폐한 형태라고 하는 분대도 있고 또한 이슬람 지도자들과 교황 및 추기경들의 회의에서 세속주의와 물질주의가 세상을 점령한다고 하였다.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계의 정치세력인 기독교 우익에서도 자신들의 기독교사상을 보수적인 정치활동으로 실현하고자 함으로써 세속주의에 반대한다.
세속주의를 지지하는 자들은 세속주의는 과학의 발달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며 또 종교적 탄압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일반적으로 위의 정의는 "세속화"(secularization)에 대한 정의로 세속주의와는 다른 뜻으로 본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4%B8%EC%86%8D%EC%A3%BC%EC%9D%98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77517&cid=50762&categoryId=51366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28243&cid=42140&categoryId=42140
기독교 성직자가 갖는 여러 제도의 관리ㆍ운영권을 비(非)성직자로 탈환하고자 하는 사상. 성직자가 국가의 권한에 속하는 세속의 사항까지도 세력을 넓히고자 하는 성직자 지상주의(cléricalisme)에 대한 반교권주의(anticléricalisme) 또는 정교분리론도 포함된다.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은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에서 전개된 교육의 주도권을 둘러싼 교회와 국가의 투쟁이다. 제3공화정기에 학교의 관리ㆍ운영은 국가의 지배하에 두었으며 그리고 결국 정교분리법(1905)이 성립되어 종교색이 배제되었다. 세속주의의 사상적인 추진 요인으로서 특히 17, 18세기의 계몽사상에서 볼 수 있는 이신론(理神論), 19세기의 과학주의, 실증주의, 유물론, 더 나아가 ‘신은 죽었다’고 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란 혁명 후(1979)의 무슬림 사회에서는 서유럽형의 정교분리를 보편적 모델로 하는 세속적 국가에 대항하여 국가의 정통성의 논거를 전통적인 종교의 원리에 두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터키 세속주의
터키의 세속주의는 터키 공화국의 종교와 국가간의 관계를 정의하는 항목이다. 세속주의는 1928년 터키 공화국의 헌법 개정시 헌법에 포함되었다. 이 때, "터키 공화국의 국교는 이슬람교이다" 라는 항목이 삭제되었다. 9년후인 1937년 2월 5일, 터키 공화국의 헌법의 제2조에 라이시테가 명시됐다.
http://www.themir.net/archives/755
케말 및 세속주의 설명
이제 터키의 현대 정치사를 살펴보자. 케말식 개혁으로 터키는 근대화·서구화되었다. 하지만 모든 터키 국민이 그 열매를 평등하게 나눈 것은 아니었다. 근대화에 빠르게 적응한 이들은 농촌보다 도시 주민, 전통적 생산자들보다 자본주의적 기업가, 지역으로는 동부나 흑해보다 유럽에 가까운 서부 주민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더 나은 생활과 소득을 누렸고, 간혹 엄청난 부를 얻어 상류 계급이 되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반대편의 사람들은 발전에서 소외되었고, 경제가 성장할수록 이러한 양극화는 심해졌다.
한편 터키 정치도 다당제로 변화하여, 1950년에 민주당이 공화인민당(케말이 만든 정당)을 누르고 집권했다. 민주당은 창당할 때 세속주의 지지를 천명했지만, 종교교육을 다시 도입하고 케말의 실책을 비난하는 등 친이슬람 노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는 공화인민당에 대항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 전략이었다. 터키 국민은 99%가 무슬림이다. 따라서 친이슬람 노선은 대중의 지지를 호소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고, 세속주의를 앞세운 공화인민당 통치 하에서 소외된 계층을 끌어들이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말하자면 친이슬람 노선은 터키식 포퓰리즘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기존의 권력 엘리트, 특히 군부를 자극했다. 1960년, 군부는 민주당이 헌법의 세속주의 정신을 위반했다며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당 정권을 전복했다. 군사법정에서 대통령은 종신형에, 총리와 주요 장관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때부터 군부가 세속주의 수호라는 명분으로 정치에 무력 개입하는 관행이 시작됐다. 1960년대~1970년대 터키는 좌우익 갈등이 극심하고 쿠르드 독립운동조직의 테러가 빈발했으며 노동자 파업도 격렬했다. 사회는 분열되었고 정치는 불안정했다. 군부는 국가 수호를 내걸고 1971년과 1980년에도 쿠데타를 일으켰다. 터키 군부는 한국과 달리 정국이 안정되면 민정으로 이양했지만, 국민들은 군부라는 ‘빽’ 없이 정권을 지킬 수 없는 공화인민당에게서 멀어졌다. 군부가 세속주의를 내세워 개입할수록 세속주의 정당의 무능력만 드러난 셈이다. 국민들이 ‘세속주의 원칙’을 지지하지만 보수적 세속주의인 케말리스트 정당까지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7. 이란의 호메이니와 이슬람 혁명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호메이니
루홀라 모우사비라는 이름으로 이란의 호메인에서 출생하였다. 조상은 페르시아인으로 그의 조부가 성지 나자프로 순례를 다녀오던 중 이란에 정착한 것이었다. <비밀의 폭로>라는 책을 저술하는 등 왕정을 부정하는 활동을 하였다. 1950년대 후반 아야톨라(Ayatollah)의 칭호를 받았고, 시아파의 지도자 보루제르디의 사후 이란 내 시아파 종교 공동체의 최고지도자가 된다. 1963년 국왕 샤 팔레비가 감행한 토지개혁과 여성해방 조치 등 '백색혁명'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했다가 체포된다. 이듬해 다시 미국을 비난했다가 친미파인 왕조 탓에 터키로 강제 추방된다.
1965년 이라크의 나자프로 옮겼다가 1971년 이란 건국 2500년 축제를 반대하는 데모를 사주하였고, 1978년 이라크에서 쫓겨나 파리 근교의 노프르르 샤토로 옮겨, 그 곳에서 이란혁명을 지도하였다. 그는 샤 정권에 맞선 가장 강력한 지도자 중 하나로 여겨졌으며 영적 지도자로 받아들여졌다.
1979년 1월 16일 혁명으로 샤가 퇴위하자 2주 후 이란으로 돌아와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그해 3월 이슬람공화국을 세우는 데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98% 이상의 찬성표를 얻었고 12월 신헌법을 공포하여 이란이슬람공화국을 성립시켰다. 그는 이맘(Imamn)의 칭호를 받았으며 1989년까지 '혁명 지도자'로서 종신 최고지도자로 이란을 통치하였다. 저서에는 <법치국가>(1971) 등이 있다. 그는 1979년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는 등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Ayatollah Ruhollah Khomeini]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37817&cid=43667&categoryId=43667
테헤란 남서쪽의 호메인(Khomein)에서 출생하였다. 이슬람 성직자이자 명망있는 학자였던 아버지 모스타파는 그가 태어난 얼마 후 농업용수에 대한 시비에 말려들어 살해되었다. 호메이니의 아버지는 지방 호족들의 횡포를 알리려다 죽음을 당했다고 전한다. 어린시절 호메이니는 쿠란 공부에 열심이었고 그가 16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마저 콜레라로 사망하였다. 소년이 되자 이슬람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지방도시 아라크의 마드라사에 유학하여 압둘 카림 하에리에게 지도를 받았고, 1920년 스승이 콤(Qom)으로 이주하여 페이지예(Feiziyeh) 학원을 창립하자 함께 동행하여 콤에 정착하였다. 당시 콤은 이슬람교 유적지가 있는 작은 도시였지만 점차 이슬람 시아파의 성지로 추앙받게 되었고 이란 내에서 가장 이슬람교 영향력이 높은 도시로 변모하여 갔다. 콤에서 호메이니는 수피즘에 심취하였으며 종교철학을 연구하며 영향력있는 성직자로 성장해 갔다. 1927년이 되자 호메이니는 이슬람어교 사원에서 이슬람 종교철학을 강의하였고,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에 들어 팔레비왕조의 종교탄압과 이슬람교 교리를 무시하는 언행이 문제가되자 그의 서구적 정책에 저항하며 정치문제에 관여하게 되었다.
팔레비 왕조의 정책에 반대
1942년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나타낸《비밀의 폭로 Kashif-i asrār》를 저술하여 팔레비왕조를 부정하고 왕이 추진하는 이란의 서구화·세속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이 책으로 호메이니는 반 이슬람 정책을 펴는 팔레비왕조와 대척점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는 무슬림들이 일어나 정권을 쟁취하여 이슬람 전통을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호메이니의 이러한 적극적 정치개입으로 그의 영향력은 확대되었고 많은 무슬림으로 부터 추앙받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 최고의 성직자에 수여하는 아야톨라(ayatollah)의 칭호를 받았고, 이슬람교 시아파(派)의 지도자 보루제르디가 죽은 후 샤리아트마다리, 밀라니와 나란히 시아파를 이끄는 3명의 중요 인물이 되었다. 국왕 팔레비가 추진하는 ‘백색혁명(white Revolution)’은 이란 근대화를 위해 추진되는 것이지만 급격한 서구화로 인해 이슬람 전통과 의식이 위협받게 되었다. 이에 호메이니는 팔레비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였다가 1963년 체포되기도 하였다.
정치에 적극적 관여와 망명생활
호메이니는 석방 후 팔레비의 친미적 정책을 강하게 비난하였으며 특히, 이란에 주둔하는 미군에게 치외법권 지위를 인정한 부분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였다. 1964년 11월 호메이니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팔레비는 그를 터키로 강제추방하였다. 터키에 머무는 동안 그는 이슬람 시아파의 교리를 저술한 《타흐리르 알 와실라(Tahrir al Wasila)》를 저술하며 건재함을 나타냈다. 그 때문에 1965년 터키 앙카라에서 이라크의 나자프로 강제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곳에는 시아파 최고성직자들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지나치게 정치문제에 관여하는 호메이니의 태도를 비난받게 하였으며, 시아파 지도층에서 호메이니의 정치적 입장과 대중의 지지도를 축소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호메이니는 이슬람 경전에 의거한 법령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란은 이슬람법에 기반하여 재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1년 팔레비 왕조는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에서 페르시아 건국 2500년 축제를 열었는데 오히려 이란 내부에서 반정부 시위는 점차 조직적으로 확대되어 갔고 국외에 머무는 호메이니를 지지도는 높아졌다. 1978년이 되자 이란 내 반정부 시위는 더욱 결렬해졌고 8월에는 시위대 477명이 방화사건으로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그해 9월에는 정부군의 무차별한 발포로 시위대 2000여 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팔레비 왕조는 호메이니를 이라크에서 다시 추방하여 쿠웨이트로 갔지만 입국이 거절되어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파리 근교의 노프르르 샤토로 옮겨, 그 곳에서 많은 지지자를 만나게 되었고 호메이니를 추종하는 인물들과 이란의 이슬람혁명을 위해 이슬람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란으로 귀국과 이슬람혁명
이란에서 반정부 시위로 인해 마침내 1979년 1월 무함마드 레자 샤(팔레비 왕)가 이란을 떠나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해 2월 호메이니는 수도 테헤란에 귀환한 후 임시 혁명정부를 조직하였으며, 바흐티야르 수상이 주도하는 정부군과 산발적인 게릴라 전투를 벌이며 이란의 정국은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결국 정부군은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며 호메이니가 주도하는 이슬람 혁명정부에 협력하게 되었다. 1979년 12월 신헌법을 공포하여 이란이슬람공화국을 성립시켰다. 그는 이맘(imamn:敎主)의 칭호를 받았으며 이슬람공화당을 결성하여 이란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팔레비 왕조에서 협력했던 반혁명 세력은 숙청되었지만 이슬람 공화국 내에서 호메이니를 지지하는 이슬람혁명파와 민주주의, 사회주의 파가 양분화되어 대립하는 갈등이 생겨났다. 호메이니는 이슬람법에 입각한 정치체제을 주장하며 서구식 정치제도에 반대하였다. 국민투표 결과 이슬람공화국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호메이니의 이슬람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은 배척되었다. 이슬람 최고성직자 사이에서도 호메이니의 이슬람공화국에 반대하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 성직자의 정치참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호메이니가 창설한 이슬람 역명위원회는 이란이 이슬람국가로서 새로운 헌법을 재정하여 가결하였다.
1979년 10월 추방된 국왕 레자 샤 팔레비가 미국으로 입국하자 호메이니는 그의 소환을 미국에 요구했지만 거부되었다. 이때문에 이란과 미국의 갈등은 격화되었고 마침내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이 점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호메이니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반 이슬람혁명파를 제거하고 이슬람공화국을 공고히하는데 활용했다. 1980년에는 이란 내 좌파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문화혁명을 주도하였는데 2년 동안 이란 내 모든 대학교가 폐교되었다. 또한 그해 9월 이라크와 종교적 갈등과 민족문제로 전쟁이 일어나자 이란 민병대를 조직하여 이라크와의 전쟁을 치루었다. 양국은 8년 동안 전쟁을 치루면서 아무런 실익도 얻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만 입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국내에서는 반호메이니 전선을 형성한 사회주의 무장세력인 무자헤딘 할크와 사회주의 정당 투데당(黨)과 싸워야만 했다. 호메이니는 1989년까지 국가의 최고지도자(종교지도자로 실질상으로 국가를 대표)로 이란을 통치하며 이슬람혁명을 이루어낸 최고의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1989년 6월 3일 사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Ayatollah Ruhollah Khomeini]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3564&cid=40942&categoryId=34312
이슬람 혁명
1979년 2월의 이란혁명을 이란측에서 부르는 명칭. 이슬람혁명은 처음부터 이슬람 국가이념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자르(bazaar, ‘시장’)의 상공업자들을 주축으로 하였으나 전국민의 자발적인 성원을 받아 반 국왕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전 국민을 대표하게 된 이는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였다. 전국의 종교지도자들도 호응하여 궐기했다.
근대적 중간층 가운데도 이슬람의 재생에 동조적인 사람들은 이 운동에 가세했다. 사회주의자도 이슬람적인 정의와 공정에 호소하는 사회적 내용을 전달하려고 했다. 혁명성취 후 혁명에 공헌한 종교지도자들이 이슬람의회에 진출했다. 민주주의·민족주의적인 정견을 누르고 채택한 이란·이슬람 공화국헌법에서는 이슬람법학자에 의한 권력행사를 구체화하여 최고지도자에게 삼권분립을 넘어서는 지위를 부여하고 종교지도자들에게 초의회적인 헌법감시평의회를 구성토록 했다. 이슬람혁명 이념으로서 경제적 자립과 착취근절을 목표로 하여 전세계의 착취자의 해방이 강조되었다. 이 주장은 다른 국가의 무슬림 대중에게도 강력한 영향을 미쳐 호응하는 운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란혁명(Iranian Revo-lution)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이슬람 혁명 [Islamic Revolution] (이슬람사전, 2002. 11. 15., 학문사)
8. 사우디 아라비아, 아랍 에미리트 등 왕정 체제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사우디 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에서 가장 보수적인 이슬람 국가이다.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사우디아리비아의 국가원수이자 통치자이다. 국왕은 절대군주로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실은 물론 정무(政務)에까지 개입한다. 또한, 국왕은 사우디아라비아 군의 최고통수권자이기도 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절대군주제의 왕정통치 국가라는 점에서 입헌군주제를 택하고 있는 영국이나 일본의 국왕이 정무(政務)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국회 다수당의 대표이자 행정수반인 수상(총리)이 정무를 맡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국가체제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왕정 절대주의에 따라 수상을 따로 임명하지 않으며, 의회는 없고 그 대신 자문위원회가 존재한다. 모든 장관은 국왕의 형제나 조카 등 근친의 왕족만이 임명된다.
국왕 자문위원회의 구성원은 120명으로 4년마다 국왕이 지명하게 된다. 2005년에 최초로 지방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실질적인 정치적 기구로서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왕정국가들은 권위주의 공화국들에 비해 국제 경제적 차원에서의 기회를
적절히 활용하는 편이며, 민간부문에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는 특징을 가
지고 있다. 일부 민간 행위자들은 다국적기업들과 합작투자를 하거나 여타 협
력관계를 추진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들 국가들은 워싱턴 컨센서스 강령 등
미국과 서구사회의 입맛에 맞는 통제된 자유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왕정국가
들은 식민지 변증법을 통한 정치발전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권위주의 공
화정에 비해 정치적으로 취약하다. 그러나 다른 정부체제와 마찬가지로 왕정
의 생존을 위해 전통적인 의미의 정당성이 아닌 군부와 경찰 병력에 상당부
분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대부분의 아랍 왕정국가는 영국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영국에게 있어서 중
동지역은 인도로 나아가기 위한 통행로에 불과했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중동지역의 내정에는 깊숙이 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9) 원문에서는 Bully 국가지도부의 경제 운용 방식과 정실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루고 있다. Ibid.,
pp. 134~167을 참고할 것.
32│ 주요 중동국가들의 정치권력구조 연구
아랍 영토를 직할 식민지로 삼기보다는 역내 주요 부족과 가문에 왕권을 부여
함으로써 이들과 결탁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국가들이 모로
코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랍 왕정국가들이며, 독립 이후 민족주의자들의 직접
적인 위협 없이 피상적이나마 비교적 안정적인 정권을 유지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구식민주의 국가들과 여전히 가까운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자국 민간 사업가들이 외국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성장하는 것을 오히
려 장려하였다. Bunker, Bully 국가들과는 달리 왕정국가들은 해외 기업이나
민간 자본을 국영화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
의 석유 메이저 회사들에 대한 국영화 작업도 최근에야 이루어졌다.
권위주의 공화정과 마찬가지로 왕정국가들도 세계화의 도전에 맞서기 위해
경제를 개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들은 식민지 변증법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급진적 민족주의자들 또는
이슬람주의 세력과 같은 정치적 반대파의 반발에 매우 취약하다. 왕정국가의
주도 세력들은 경제개혁에 따른 이슬람 금융가들의 높은 정치적 영향력을 감
안하여 이슬람주의 반대세력을 근대화하고 이들에게 지분을 제공하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정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웨이트의 경우
이슬람주의 정치세력을 제도권 내로 어느 정도 편입시킴으로써 자신들의 개
혁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전략을 택한 바 있다
9. 이란,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이란 · 이라크 전쟁
승자가 없는 전쟁(1980년 ~ 1988)
이란 · 이라크 전쟁 - 승자가 없는 전쟁(1980년 ~ 1988년)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 7. 16., 가람기획)
2차대전 이후 약 50년 동안 중동지역은 세계적 분쟁지역이 되어왔다. 정치 · 종교 · 민족적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다가 세계적 석유산지로서 강대국의 이해가 맞부딪치는 통에 그 지역에서 전쟁은 자주 발생했다. 그 가운데 이란 · 이라크 전쟁은 두 나라가 지역 패권을 놓고 싸운 각축전이었다. 이란은 페르시아 문화권을, 이라크는 아랍 문화권을 대표하는 국가이다.
전쟁의 직접적 발단은 이란이 1979년 혁명으로 혼란상태에 빠지고 급속도로 군사력 쇠퇴현상을 보이자,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이 그것을 호기로 삼고 이란을 침공한 데서 비롯되었다.
1975년 알제이 협정에서 양국 간 현안문제였던 샤트-알-아랍 수로 경계선을 이라크가 이란에게 유리하게 양보한 것은 군사력 열세 때문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그 수로에 대한 영유권을 되찾겠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후세인은 지역패권을 찾겠다는 야심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1980년 두 나라 국력을 비교하면 석유매장량은 비슷하나, 인구 · 영토 · 국민 총생산액 등에서 이란이 훨씬 앞섰다.
그러나 당시 군사력은 이라크 측에 기울어 있었다. 혁명 소용돌이 속에서 이란이 군대를 홀대한 데 비하여 이라크는 군비확장 정책을 강화시킨 결과였다. 육군 정규군의 경우 이란은 5년 전의 285,000명에서 150,000명으로 감축되어 있었고, 반면에 이라크는 100,000명에서 200,000명으로 배가되었다. 탱크 · 야포 · 항공기 등의 숫자는 양쪽이 엇비슷했으나, 크게 차이가 난 것은 가동률이었다. 이라크가 80%인데 비하여 이란은 50% 이하였다.
1980년 9월 22일 이라크 공군은 이란 내 주요 공군기지에 대한 기습으로 전쟁을 개시했다.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 공군의 성공사례를 적용시켜 그들도 이란 공군을 공중 아닌 지상에서 모조리 파괴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라크 공군은 이스라엘군을 흉내낼 만한 수준이 못 되었다. 빤히 노출되어 있는 활주로도 제대로 맞추지 못할 만큼 그들의 폭격실력은 엉망이었다. 더구나 이란 공군기들은 2m 이상 두께의 특별 격납고와 콘크리트 방호벽으로 보호하고 있음으로써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침공 당일 이라크의 지상군 공격은 공군에 비해서는 훨씬 나았다. 1,300㎞에 이르는 국경선상에서 몇 군데 돌파구를 찾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북부의 카슬에쉬린과 중앙의 메헤란을 돌파하고 남부의 석유자원지대인 후제스탄 지방을 침공하는 데 성공했다.
침공 일주일이 지난 9월 28일 후세인은 일방적으로 전쟁중단을 선언했다. 이미 영토상 목표를 획득했으므로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혼자서 전쟁을 개시하고 마음대로 전쟁을 끝내겠다고 한 것이다.
초전에 이란 군은 패배했으나 결코 섬멸된 것은 아니었다. 이란은 협상제의를 단호히 거절하고 장기전을 준비했다. 이후 전쟁은 8년을 끌며 여러 단계에 걸쳐 공방을 교환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세계 강대국들은 적극적 중재를 위하여 나서지 않았다. 미국 · 소련 · 중국 · 영국 · 프랑스 등은 각기 무기판매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전화(戰火)가 페르시아 만으로 번지며 국제전화할 조짐을 보이자 1987년부터 유엔은 정전을 위한 중재에 나섰다. 결국 1988년 8월 유엔이 내놓은 정전안을 수락하고 이란과 이라크는 서로를 겨눈 총부리를 내렸다.
이라크와 이란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하고 단지 실패와 엄청난 피해만을 낸 채 끝난 전쟁이었다. 양쪽은 합하여 약 100만 명 이상의 인명피해와 약 1조 달러 이상의 물적 피해를 입었다. 이후 양쪽은 석유 부유국에서 부채 많은 빚쟁이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전쟁은 지도자의 대전략이 적절하지 못하여 국가와 국민을 파국상태로 몰고 간 대표적 전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후세인은 과대망상증 환자였으며, 그가 제한전쟁과 단기전 개념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가정이었다. 군사력이 약간 우세하다고 하여 그것만으로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후세인은 이란 국민들의 혁명정부에 대한 지지와 침략국에 대한 적대감과 전투의지를 너무 과소평가했었다.
이 전쟁은 가시적인 군사력만으로 상대의 전투력을 계산해서는 안 되며, 전쟁이란 시작하기보다 끝내기가 훨씬 어렵다는 진리를 거듭 일깨워준 전쟁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란 · 이라크 전쟁 - 승자가 없는 전쟁(1980년 ~ 1988년)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 7. 16.,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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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걸프전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걸프전쟁과 헤일 메리 플레이
고전적 전법을 적용하여 승리하다(1991년)
[네이버 지식백과]
걸프전쟁과 헤일 메리 플레이 - 고전적 전법을 적용하여 승리하다(1991년)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 7. 16., 가람기획)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함으로써 발발한 전쟁은 미군을 주축으로 하여 편성된 다국적군과의 전쟁으로 확대되고 페르시아 만(Persian Gulf) 지역에서 발생했다고 하여 걸프 전쟁이라고 불린다.
다국적군 편성을 주도한 미국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제2의 베트남전쟁과 같은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되고 신속한 군사작전으로 결정적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는 개념으로 출발했다.
다국적군은 동맹군도 아니고 공식적인 연합사령부도 없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 중부군 사령관 슈워츠코프(Norman H. Schwartzkopf) 대장의 지휘를 받았다. 슈워츠코프는 이라크군에 대한 작전을 '사막의 폭풍작전'이라고 명명하고 10월부터 세부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기본 작전개념은 미국군의 이점을 최대로 살리고 인명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으로서, 공군력을 대량 투입하여 전략폭격을 실시한 다음에 고립된 이라크 지상군을 격멸한다는 방식이었다.
한편 이라크의 후세인은 모든 유엔 결의안을 무시하고 그가 선언한 '19번째 주 쿠웨이트'에 4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라크군은 사우디 국경을 따라 벙커와 흙벽 등을 설치하는 한편, 최전방에 50만 개의 지뢰를 매설하고 그 후방에는 기름 호를 파놓아 다국적 군이 접근할 때는 원격조정으로 불바다를 만들 계획이었다.
유엔이 제시한 철수시한을 그대로 넘기자, 다국적군은 드디어 1991년 1월 17일 사막의 폭풍작전을 개시했다. 이때부터 2월 28일까지 6주 동안 작전은 약 1,000여 시간의 제1단계 공중폭격과 100시간의 제2단계 지상전으로 펼쳐졌다.
다국적군은 압도적인 공군력을 투입하여 이라크의 미사일 기지, 지휘통제소, 통신시설, 발전소, 비행장, 활주로, 격납고 무기공장, 교량, 그밖에 주요 군사거점을 매일 수천 번씩 폭격을 가했다. 세계전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성공적이었던 이 폭격으로 이라크 전투력은 지상전을 전개하기에 앞서 약 50% 이상 감소되었다.
지상전은 2월 24일 새벽 시작되었다. 목표는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몰아내고 주력부대인 '공화국 수비대'를 격멸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슈워츠코프는 이라크군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에서 주공을 실시하는 계획을 세웠다. 계획의 골자는 방어가 집중된 사우디-쿠웨이트 국경지역을 견제하고 2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서쪽 사막지역으로 우회하여 이라크 영토로 깊숙이 진격한 다음 공화국 수비대를 격멸한다는 것이었다. 슈워츠코프는 이 작전을 미식축구에서 쿼터백이 장거리 볼을 던져 큰 점수를 내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하여 '헤일 메리 플레이(Hail Mary Play)'라고 불렀다. 이 기동은 고대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래 명장들이 사용한 전법으로서, 슈워츠코프는 바로 그러한 고전적 전법에 따른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후세인이 전방방어에 몰두하고 있을 때 슈워츠코프는 지상군 주력부대를 은밀히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이 이동은 공중작전 엄호 하에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는 가운데 하루 24시간씩 2주 동안 계속되었다. 300마일의 거리를 제한된 도로를 이용하여 병력과 물자를 수송한 다음에 다국적군은 전투준비를 완료했다.
한편 슈워츠코프는 이라크군을 기만하기 위하여 쿠웨이트 해상 밖에 많은 해병병력을 주둔시켜 상륙작전을 연습시켰다. 후세인은 미해병대 위치에 대하여 중시하고 다국적군이 쿠웨이트 남쪽에서부터 상륙작전을 시도하리라고 믿었다.
서쪽 사막지역에서부터 기갑부대와 공수부대에 의한 기습공격은 순식간에 이라크군 보급선과 퇴로를 끊는 데 성공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이라크군은 이내 붕괴되기 시작했다.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그들은 별로 저항도 못하고 항복했다. 2월 27일 다국적군은 쿠웨이트를 해방시켰다. 후세인은 유엔 결의안의 모든 사항을 수락함으로써 걸프 전쟁은 종결되었다.
걸프 전쟁에서 다국적군의 승리는 충분한 준비로 이루어낸 것이었다. 졸속하게 싸움에 빠져들지 않고 확실하게 전투력의 우세를 확보하기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한 것이 주효했다. 싸우기 전에 이겨놓고 싸워야 한다는 원리가 잘 적용된 대표적 전쟁이었다.
걸프 전쟁은 다국적군 입장에서 살펴볼 때 전쟁사상 인명피해가 가장 적으면서 대승을 거둔 전쟁이었다. 이라크군 전사자가 10만 명인 데 비하여 다국적군은 225명에 불과했다.
걸프 전쟁이 시사하는 가장 의미 있는 교훈은 첨단병기가 위력을 떨치는 현대전에서도 고전적 전법이 승리를 가져왔다는 중요한 사실이다.
슈워츠코프는 우회기동을 결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것은 적진 깊숙이 들어가 적 전열을 흔들어놓고 적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는 이길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 이길 수 있다. 우리가 걸프전에서 적용한 것은 고전적 개념에 충실한 우회기동이었다. 그것은 고대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래 대부분의 명장들이 적용한 고전적 전법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걸프전쟁과 헤일 메리 플레이 - 고전적 전법을 적용하여 승리하다(1991년)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2010. 7. 16.,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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