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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인문

<시지프의 신화(The Myth of Sisyphus)> 알베르 까뮈, 1942


단지 그것에 불과하다


시간이 우리들에게 무서운 것은 시간이 증명을 하고 해답은 그 뒤에 찾아오기 때문이다. 


시간의 이음매가 떨어졌다. 


단호한 영혼은 항상 절망이라고 하는 대답을 받아들이게 되리라. 


저녁 해질 무렵의 바람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의 어깨에 얹혀진 손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이 각각 그 진리를 갖고 있다.


죄란 아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알고자 원하는데 있다. 


부조리한 인간은 불길로서 타오르고, 게다가 차갑게 얼아붙은 우주, 어디까지나 투명하고 한계가 있는 우주, 무엇하나 가능하지 않지만 모든 것이 주어지고 있는 우주, 그것을 지난 다음에는 붕괴와 허무 그것밖에 없을 듯한 우주를 엿본다. 


20160707 2회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p15 부조리와 자살


나는 어떤 사람이 존재론적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p16


그런가 하면 역설적이게도 자신에게 살아갈 이유를 부여해 주는 이념 혹은 환상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p16


시간이 우리에게 공포를 주는 것은 시간이 증명을 하기 때문이며 해답은 그 뒤에 온다. p33


인간의 입장에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켜서 거기에 인간의 낙인을 찍는 것이다. p35


내가 나의 존재에 대하여 갖은 확신과 내가 그 확신에 부여하려는 내용 사이에 가로놓인 단절은 결코 메워질 수 없을 것이다. p38


그러나 부조리한 것은 바로 이 합리와, 명확함에 대한 미칠것 같은 열망의 맞대면이다. p41


만약 내가 나와 내 삶의 관계를 조절하는 부조리를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그리고 만약 이 세계가 보여 주는 온갖 광경 앞에서 나를 사로잡는 이감정을, 지식의 탐구가 나에게 강요하는 통찰을 확신한다면, 나는 모든 것을 희생하여 이러한 확신들을 지켜야 하며, 이 확신들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지탱해야 마땅할 것이다. p41 부조리의 추론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은 더이상 필요가 없으리만큼 수없이 되풀이되었다. 그럼에도 우리 시대에는, 마치 이성이 언제나 앞장서서 전진하기ㄹ의 체계들이 새는 역서하ㅇ을 비틀거리게 하기에 부시, 그 이서다는 듯라도 해ㅇ겨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서ㅇ의 시ㄹ제 효능보다는 차라리 그 이성의 희망이 얼마나 강렬한가를 증명한다. p42


"우연하게도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고귀함이다. 내가 그 고귀함 위에서 지배하려는 그 어떤 영원한 의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나는 모든 사물에게 그 고귀함을 되돌려 주었던 것이다."라고 한 차라투스트라의 위대한 절규 이래로, "그 뒤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한 키르케고르의 저 치명적인 병 이래로, 부조리의 사유에 대한 의미 있고 괴로운 주제들은 그치지 않고 잇달아 등장했다. p43


"실패가 가능한 일체의 설명과 해명을 초월하여, 허무가 아닌 초월적인 존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돌연히 그리고 인간적 믿음이라는 맹목적인 행위에 의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 존재를 그는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의 상상할 수 없는 통일"이라고 정의한다. 이리하여 부조리는 신(神, 이 말의 가장 넓은 뜻에서)이 되고, 이해의 무능력 그 자체가 모든 것을 발혀 주는 존재로 돌변한다. p56


한편 셰스토프는 자신의 부조리를 일상적인 도덕과 이성의 대립적인 것이라고 보면서 그것을 진리라고 부르고 속죄라고 부른다. p58


"바야흐로 시간의 나사가 빠져 버렸도다 (The time is out of joint)" 햄릿 p59


이해하려는 우리의 욕구와 절대에 대한 우리의 향수는 바로 우리가 많은 것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설명될 수 있을 뿐이다. p60



부조리한 인간


"나의 영역은 시간이다."라고 괴테는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부조리한 말이다. 부조리한 인간이란 실제로 어떤 인간인가? 영원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영원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다. 그가 영원에 대한 향수를 조금도 느끼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향수보다는 자신의 용기와 이성 쪽을 택한다. 용기는 그에게 구원을 호소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 자족하는 것을 가르쳐 주며, 이성은 그의 한계를 가르쳐 준다. p103




부조리한 창조


"에술, 오로지 예술, 우리는 예술을 가지고 있기에 진리로 인하여 죽지 않을 수 있다."라고 니체는 말했다. (우상의 황혼) p144 


부조리의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설명하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묘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통찰력을 갖춘 무관심이다. 

묘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사고의 최종적 야망이다. 과학 역시 그 역설들의 끝에 이르면 제안하기를 그치고 발을 멈춘 채 제 현상의 항상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고 묘사한다. p145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혹은 결국 같은 말이지만 자신의 세계를 한정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그의 경험과 갈라놓은 근원적인 불화에서 출발하여 그의 향수에 따른 화해의 소지를 찾고자 하는 것이며, 참을 수 없는 절연 상태를 해소하게 해주는 세계, 이성에 의하여 완벽하게 규제된, 혹은 유사점들에 의하여 환하게 조명된 세계를 찾고자 한다는 의미다. 철학자는 창조자다. 칸트라 할지라도 그렇다. 그에게는 자신만의 인물들과 상징들과 내밀한 행동이 있다. 그에게는 특유의 결말이 있다. 그와 반대로, 시와 에세이에 비하여 소설이 우위를 점하는 것은 겉보기와는 달리 그것이 오직 예술의 보다 더한 지성화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오해 없기 바란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특히 가장 위대한 작품들의 경우다. 한 장르의 풍부함과 위대함은 흔히 그 장르에서 배출되는 쓰레기에 의해 측정 되는 수가 있다. 졸렬한 소설이 많다고 해서 가장 훌륭한 소설들의 위대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실 잠시 동안 키릴로프는 죽어가는 예수가 '천국에서 돌아간 것이 아니'라고 상상한다. 그때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무용한 것이었음을 알았다. "자연의 법칙은 그리스도를 기만 속에서 살게 하고 기만을 위해 죽게 만들었다."라고 기사 키릴로프는 말한다.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예수는 인간의 드라마를 송두리째 체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가장 부조리한 조건을 실현한 사람이기에 완전한 인간인 것이다. 그는 인간-신이 아니라 신-인간이다. 그리하여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도 십자가에 못 박히고 기만당할 수 있다.

p162







"he enjoys a freedom with regard to common rules".


https://en.wikipedia.org/wiki/The_Myth_of_Sisyphus









나에게 책을 읽고 그 소감문을 쓸 때 까다로운 점 중 하나는 바로 시작이다. 나는 무엇에 대해 쓸 것인가? 나중에 이 글을 보게 될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불안감과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은 어떻게 해서든 컴퓨터를 무릎에 앉혀 놓고 어떻게서든 글을 쓰고 싶은 나의 욕망망과 힘겨루기를 한다.


까뮈, 카프카, 키에르, 니체 등 굳이 내가 이들을 동류에 넣는 이유는 아마 나의 생각과 사고를 이루는 한 영역에 비슷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미래에도 아마 주관과 객관을 일치키시려는 노력을 계속 될 것이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이해했을 때, 행복을 느끼며, 앞으로 불안한 미래를 예측하며, 대비할 수 있다. 그러한 확실성 혹은 진리를 추구하는 노력, 그리고 그 과정들은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이다. 카뮈는 이러한 인간의 속성들의 결과보다는 과정에 초점울 둔 것 같다. 인간이 얻기 위한 모든것들은 무의미하며, 불확실 하다. 그렇기에 그 어떤것이든 개인에게 유의미하며, 확실한 것으로, 그렇기에 삶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로 표출 하는 그 의미없는 아름다운 과정을 주목한것 같다. 


내 신앙관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 혹은 믿음을 빙자한 위선적인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너무 두려운 나.내자신의 욕망을 투영하여 신을 만들지 않기 위해, 혹은 비 신앙인들에 대한 보호본능, 혹은 신앙인들을 향한 교만한 나를 만드는 도구로써, 부조리는 참 매력적이였다. 과거와 달리 지금 나에게 부조리는 예전만큼 강력하지 않다. 아마 나의 몸이 조금씩 약해지고, 그를 핑계로 사회에 적응하고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혹은 하나님이 나에게 어떠한 마음을 주셨기 떄문일지도 모른다. 원인이 무엇이든 지금의 나에게는 과거에 나는 이랬다. 라는 점을 발견하고 있다. 


나는 지금 어떤 돌을 산으로 옮기고 있으며, 나는 어떻게 옮기고 있는가? 왜 옮기고 있는가? 그 의미를 찾지 못하더라도, 나는 계속 옮길 수 있을까? 


기도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스스로 발견케 함을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