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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인문

<몽테뉴의 수상록> 미셀 드 몽테뉴, 1580




삶을 사는 동시에 죽음을 산다


"이 세상에 들어갈 때 처럼 나오라. 죽음에서 삶으로 두려움 없이 들어갔던 그 길이 삶에서 죽음으로 나오는 길이다."


당신의 죽음은 만유 질서의 한 조각이자 세계의 생의 한 조각이다.


"주자가 횃불을 넘겨주듯 사람들은 서로 생명을 내준다."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의 원리를 어찌 그대를 위해 바꾸겠는가? 그대는 이같이 아름다운 원리를 통해 창조되었으며 죽음은 그대의 일부다. 죽음에서 도망하는 것은 곧 자신에게서 도망하는 것이다. 지금 누리는 그대의 존재 역시 죽음과 삶에 동시에 속해 있다. 태어난 첫날부터 그대는 삶을 사는 동시에 죽음을 사는 것이다.



죽음은 자연의 원칙에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득이 되는 것은 다른이에게 실이 된다. 하나의 예로 아테네의 데마데스(Demades)가 자기 마을의 장의사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죄목은 그자가 많은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판결이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희생을 치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없으며, 그렇게 따지면 모든 종류의 소득을 단죄해야 하기 떄문이다.


장사꾼은 청년이 방탕할 때, 농부는 밀 가격이 비쌀 때, 건축가는 집이 무너졌을 떄, 사법관은 소송과 분쟁이 있을 떄 돈을 잘번다. 성직자들 역시도 우리가 죽거나 악을 행할 때에야 존경을 받고 제 역할을 한다.


어느 고대 그리스 희극에서는 자기 친구들이 건강할 때 기뻐하는 의사 없고, 자기 마을이 평화로울 때 좋아하는 병사 없으며, 이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라 했다. 심지어 개개인이 자기 속을 들여다보면, 결국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일은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싹트고 자라남을 발견할 것이다.


이생각을 하다 보니 죽음이 자연의 원칙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연학자들은 모든 것의 기원, 성장, 발달이 다른 것의 변질과 퇴화에 상응한다고 간주한다.


"무언가 변하고 본성을 거스른다는 것은 이전에 존재하던 것의 죽음을 의미한다."


빨리 늙기보다는 늙어 있는 시간을 최소화 한다.


"지나간 삶을 향유하는 것은 두 번 사는 것과 같다."




죽음은 결론일지언정 삶의 목표는 아니다.


"육체적인 고통 자체보다 그것에 대한 생각이 우리 감각에 더 영향을 준다."


죽음에 직면하면 우리는 '절대 피할 수 없는 일은 더이상 피하지 않겠노라'라며 즉시 결심한다. 엣날의 수많은 검투사들은 싸울 떄는 비겁했을지라도 그들 앞에 놓인 죽음은 담대하게 받아들였다. 적군의 검에 목을 내어주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에 비해 죽음이 오기 전에 죽음을 대면하는 일은 의지를 다지는 데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더욱 어렵다. 죽는 법을 모르더라도 괜찮다. 자연이 장차 충분하고 완전하게 알려줄 것이다. 자연이 그대를 위해 이 일을 맡아줄 테니 애쓰지 않아도 된다.


"인간은 불확실한 죽음의 시간과 죽음으로 가는 길을 알고자 헛되이 힘쓴다. 급작스럽고 확실한 불행보다 불행을 기다리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


중략


철학은 윌에게 죽음을 항상 눈앞에 두고, 미리 생각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예지와 생각이 우리를 다치게 하지 않도록 주의사항과 규칙을 알려준다.


중략


그러나 나는 죽음이 결론일지언정 삶의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의 끝이자 극단에 죽음이 있지만 그렇다고 죽음이 삶의 목적은 아니다. 삶이 삶 자체의 목적이자 목표여야 하며 스스로 결정하고 처신하도록 용인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앎은 삶을 이해하는 방법의 일부일 뿐이다. 죽음에 대한 염려에 무게를 실어주지만 않는다면 이는 가벼운 삶의 요소일 수 있다.


죽음의 대한 앎은 삶을 이해하는 방법의 일부일 뿐이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간다.


우리는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지 못하고 언제나 그 너머를 향해 있다. 두려움과 욕망 그리고 기대는 우리를 미래로 내던져 앞날을 그려보는 즐거움을 앗아가고 미처 깨닫기도 전에 현재의 시간을 흘려보내게 만든다. 미래에 대해 근심하는 영혼은 불행하다.


플라톤은 이 고귀한 가르침을 이렇게 인용하곤 했다. "네 일을 하고 너를 알라." 이 말의 두 요소는 각각 우리의 모든 의무와 동시에 서로를 포괄한다. 자기 일을 제대로 해낸 사람은 네 일을 하라는 말이 곧 네가 누구인지를, 너의 것이 무엇인지를 알라는 의미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은 남의 일을 자기가 취하지 않고,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를 사랑하고 계발하며, 필요 이상의 소유나 불필요한 사유와 명제를 거부한다.


미련한 사람은 원하는 것을 얻고도 기뻐할 줄 모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절대 자신에 대해 불만을 품지 않는다.



나를 잘 알기에 거짓 찬사를 즐기지 않는다.


모든 일을 명예와 영광을 위해 하는 자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고 가면을 쓴 채 등장한다. 그러나 이로써 그들은 무엇을 얻는다고 생각하는가? 누군가 꼽추의 키를 칭찬한다면 상대방은 이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대가 소심한 사람인데 우리가 그대를 용맹스럽다고 치하한다면 과연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상이 그대가 맞는가? 이는 우리가 그대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절받기를 좋아한는 사람을 보면 그가 무리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해 존경을 표하지만 실은 한낱 하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케도니아의 왕 아르켈라오스가 길을 가고 있을 때 누군가 그에게 물을 뿌리자 그와 함께 있던 자가 그 죄인을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고 왕은 이렇게 답했다. 


"그렇소, 하지만 그는 나에게 물을 부은 것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인 줄 알고 그 사람에게 부은 것이오."


소크라테스는 그에 대해 사람들이 험담을 했다고 하자 "그들이 하는 이야기 중에 나는 없소."라고 말했다. 나의 경우에도 나를 좋은 지도자이며 겸손하고 정숙하다고 칭송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지도 않을 뿐더러 나를 도적이자 반역자, 술꾼이라고 말하는 자들에게도 전혀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 거짓 찬사를 즐기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스스로를 잘 알고 가장 깊은 곳까지 탐색해 나의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제대로 알려지기만 한다면 나는 사람들에게 칭송을 덜 받아도 만족한다.



시시각각 기분에 따라 흔들리며 살지 않는다.


평소에 우리는 욕망의 변화에 따라 상하좌우로 상황의 바람이 부는 대로 끌려간다. 무언가를 원하는 순간까지는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하지 않다가, 그 순간이 닥치면 환경에 따라 색깔을 바꾸는 어느 동물처럼 별안간 마음을 바꾼다. 방금 제안 했던 일에 대해 우리는 금세 마음을 바꾸고, 이내 또 변해서 원래의 위치로 되돌아온다. 이렇게 우리의 욕망은 자주 흔들리며 일관성이 없다.


"우리는 다른 이의 힘을 빌어 움직이는 꼭두각시 같다."


우리는 스스로 나아가지 않는다. 잔잔하거나 물결치는 물 위를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격렬하게 떠다니는 물체처럼 여기저기 이끌려간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그렇게 하면 자기의 짐을 덜어버릴 수 있다는 듯이 쉼 없이 모색하고 끊임 없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우리는 매일 새로운 생각을 하고 시시각각 기분도 달라진다.


"인간의 마음은 목성이 지구에 보내는 빛만큼이나 자주 변한다."


우리는 수많은 생각 사이로 떠다니지만 그 중 어느 것도 확실하게 자유롭지 않고, 그것들을 지속적으로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머릿속에 명확한 조직과 규범을 확립하고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은 원칙과 현실 간의 적절한 질서와 관계를 유지할 줄 알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일관성 있게 처신할 것이다.


세상은 나를 알기 위해 들여다봐야 하는 거울이다.


사람의 판단력은 세상과 소통하면서 놀랍게 계발된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자신에게 속박되고 짓눌려 있어 바로 코앞의 일밖에 보지 못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달랐다. 소크라테스에게 그의 출신을 물었더니 그는 "아테네요."라고 하지 않고 "세계요"라고 답했다. 발밑밖에 보지 못하는 우리와 달리 소크라테스는 훨씬 풍부하고 광대한 상상력을 갖고 있어 모든 인간에 대한 지식과 친분, 감정을 버리고 세계를 자기 집으로 삼았다.


과거 우리 마을에서는 포도밭에 서리가 내리면 이것이 신이 인류에게 진노했다는 증거이며, 식인종들이 이미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신부님이 있었다. 이런 논리라면 내란으로 나라가 뒤집어진 순간 심판의 날이 우리를 사로잡았노라고 소리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더 심한 일도 무수히 있었으며 그와 동시에 지구의 수많은 지역에서는 이와 상관없이 좋은 시절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도 못한 채 말이다. 방종하고도 처벌 받지 않는 전쟁이 그렇게 부드럽고 온화하게 지나간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는 모두 부지불식간에 엄청난 결과와 피해를 가져오는 오류에 빠져 있다. 그러나 위엄 가득한 대자연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다양함 속에서도 변함없는 자연의 얼굴을 읽어내며,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뿐만 아니라 아주 미세하고 섬세한 점으로 표시된 왕국 전체를 발견하는 자라면 모든 것을 본연의 크기대로 판단할 수 있다. 하나하나가 유에 속하는 종으로 증식하는 이 큰 세상은 바로 우리를 바르게 알기 위해 들여다 봐야 하는 거울이다.


요컨대 나의 제자들이 거울을 책 삼아서 봤으면 좋겠다. 다양한 기질, 종파, 판단, 견해, 규율과 관습들은 우리에게 판단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우리의 판단이 불완전하며 본질적인 허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이것은 결코 하찮은 가르침이 인다.


꿀벌들은 꽃밭에서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결국에는 온전히 자신만의 꿀을 만들어낸다.


으허허 책을 정리겸 필사하다보면 필사하다 정신이 다 소모된다... 필사하면서 다시 읽게 되고 아 맞다 내가 이부분에서 감명받아서 체크했지? 생각하며 다시 곱씹게 되는 장점이 있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하면 정신력이 고갈되어 쓰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뭐 그래도 익숙해지다 보면 괜찮겠지..? 블로그에 필사하는 것도 저작권이 걸릴까봐 시 이외에는 다 비공개로 돌렸는데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읽히는 글을 쓸 수 있게되면 좋겠다. 남들에게 읽힌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잘 쓴 것이고, 타인에게 이해하기 쉽게 썼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내 글쓰기 스킬이 늘었다는 것과 내 생각의 폭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것이겟지..? 그래도 차근차근히 쓴다는데 의미를 두자. 몽테뉴도 미래에 대한 욕망 때문에 현실을 못보고 지나가지 말라고 했으니까...


이 책을 사게 된것은 아마 교보문고에서 발터벤야민의 사진의 역사를 사려고 했다가 노잼같아서 옆에있던 몽테뉴책을 골라 사게 됬다. 워낙 많은 책에서 다양하게 인용되었기에 한번쯤 읽어 볼겸 샀다. 최근에 글을 읽어도 출퇴근시간이나 잠깐 읽어서 뇌에 남지도 않고, 감명도 크게 받은 책이 없어서 아쉽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는데, 이 책 또한 아 이번에도 글럿네 라는 실망감으로 읽었다. 그래도 문체가 쉽게 읽히고, 공감되는 내용이 많아 다시 필사하다 보니 몇가지 건졌다.  죽음에 관한것, 나에대한 타인의 평가, 미래에 대한 근심.. 한번쯤.. 아니 많이 생각했고 고민했던 내용들이다. 몽테뉴가 하는 말이 다 맞는것은 아닐 지라도 답안지에 적을만한 답을 하나 얻어서 나름 만족스럽다.


꿀벌들은 꽃밭에서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결국에는 온전히 자신만의 꿀을 만들어낸다.

나 자신만의 꿀을 만들기 위해 세상을 더 체험하고, 나에게 맞는것 그리고 옳은것을 찾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꿀벌이 지치지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