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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인문

<그리스도와 문화>리처드 니버, 2007

그리스도
사랑과 믿음으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분
문화
자연 위에 인위적으로 생기는 모든 것(언어, 예술, 통념, 종교 과학 등)

그리스도 <-> 문화
배척
합의
문화속, 문화위에
타협, 거부 그러나 소망을 보며 살아가야 함 ->루터
회심 문화가 있어야 그리스도를 돌아볼 수 있다 -> 칼뱅

고대 로마 문명이 기독교를 배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로마가 관용적이었기 때문이라고 기번은 말한다. 지극히 다채로운 관습과 종교를 가진 로마 문화가 존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거기에 속한 여러 민족의 전통과 의식(儀式)을 존중하고 승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분파든지 스스로를 인류 공동의 장이 떼어내어 자신들만 신적인 지식을 소유한다고 주장하고, 자신들의 예배를 제외한 다른 모든 예배를 경건치 못하고 우상 숭배에 불과하다고 멸시할 경우에는 모두가 한 목소리로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p.80

로마인이 유대인에 대해 어느 정도 관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신들과 우상들에 대해 그리스도인과 똑같은 신념을 지녔음에도 오랜 전통을 가진 별개의 민족이었고 또 대체로 사회생활에서 물러나 조용히 자족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로마 사회의 일원이었고 그 사회 한복판에서 다른 종교들에 대해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조롱하는 언사를 퍼부었다. 그 결과 그들은 로마인에게 관습과 교육의 성스러운 유대를 끊어 버리고, 자기 나라의 종교 제도를 침해하고, 건방지게도 자기 조상들이 믿고 경외했던 진리와 거룩한 관행을 멸시하는 반역자로 비쳤던 것이다. 여기에 덧붙일 점은, 로마인의 관용은 현대 민주주의의 관행처럼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정책으로 시행되었던 것인 만큼 한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무슨 종교를 따르든지 시저에 대한 충성은 필수요건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가지 면에서 모두 문화의 통일성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이교도가 지향하던 보편주의는 여러 신과 종교를 단 하나의 지상적 혹은 천상적 군주 아래 묶으려 했는데 반해, 그들은 유일한 하나님만 믿는 급진적 일신론(一神論)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p.81

그리스도인은 흔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그리스도인을 더 정확히 기술하자면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삶, 말, 행위, 운명-를자신과 자신이 속한 세상을 이해하는 열쇠로, 하나님과 인간,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의 주 원천으로, 양심의 지속적인 동반자로, 악으로부터 구해 줄 자로 여기는 등 그분을 최고의 자리에 모시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85

예수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개념은 순종의 개념만큼이나 텅 비어 있고 형식적이다. 마치 자유주의에서 하나님이 인간 사랑의 상대역인 것처럼, 실존주의에서는 순전히 도덕적 결정의 상대역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그분은 인간 에게 결단을 강요하는 권능(Power), 인간이 "그 안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실제로 인식할 수 있는 분"이다. “자기 삶의 본질이 완전한 결단의 자유에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하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사라져야 마땅하다.” 물론 사변적이고 자연주의적인 하나님 관념에 반하는 실존주의의 적대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예수께 이런 20세기의 자유 개념을 덮어씌우는 것은 신약의 그리스도를 희화화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파격적일 정도로 순종적인 예수
는 하나님의 뜻이 곧 모든 자연과 모든 역사의 창조주요 통치자인 분의 뜻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또 그분의 뜻에는 어떤 구조와 알맹이가 있다는 것, 그분이 십계명의 창시자라는 것, 그분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요구한다는 것, 그분은 자신에 대한 순종뿐 아니라 사랑과 믿음도 그리고 자신이 창조하고 사랑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도 요구하신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이 예수는 실로 파격적으로 순종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분은 사랑과 믿음만이 그 순종을 가능케 한다는 것도 아신다. 아울러 하나님이 이 모든 선물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도 아신다. 그분의 순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 하나님은 결단의 순간에 만나는 무조건자(Unconditioned)를 훨씬 뛰어넘는 존재다. p.102

우리가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다룰 때 염두에 두는 '문화'는 인간 활동의 총체적 과정과 그 활동으로 인한 총체적 결과를 가리키는 말로서, 지금은 일상적으로 문명이란 이름도 거기에 붙인다. 문화란 인간이 자연에다 덧붙이는 '인위적이고 이차적인 환경'이다. 거기에는 언어, 습관, 관념, 신념, 관습, 사회 조직, 물려받은 인공물, 기술적 과정, 가치관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런 사회적 유산', '독특한 현실'을 일컬어 문화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는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종종 “이 세상"을 거론할 때 염두에 두는 것이며, 여러 형태로 나타나긴 하지만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 문화라는 것의 '본질'을 감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 주요 특징 몇 가지는 설명할 수 있다. 먼저 그것은 인간의 사회생활과 뗄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얽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언제나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고 하겠다. “우리가 몸담으면서 경험하는 그 문화, 우리가 과학적으로 관찰하는 그 문화와 관련된 본질적 사실은 그것이 모든 인간을 영구적 집단들로 나눈다는 점이다.”말리노프스키(Malinowski)의 말이다. 글쎄, 이것이 본질적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기정사실의 본질적 측면임은 분명하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문화를 자기 나름대로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즉 문화의 어떤 요소를 바꿀 수 있지만, 그 문화 자체는 언제나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고 하겠다. p.112

귀신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 문화에서는 대신을 어떻게 쫓아낼 수 있을까? 여기서 문화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단 두 가지 대안뿐인데, 하나는 예수가 살았던 그 문화를 재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말을 다른 사회 질서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일도, 이웃의 성격에 대한 문화
적 이해가 수반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며, 문화적으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 존재로서 상대방 - 가족이나 종교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민족의 친구나 적으로서, 가난하거나 부유한 자로서 -을 파악하고 그에 걸맞는 구체적 행위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p160

예수의 말은 본래 기독교 문화를 위한 윤리적 규율로 의도된 게 아니였고, 설사 그런 식으로 적용된다 하더라도 일상생활의 모든 의문에 답해 주기에는 부족하다. 그 밖의 다른 도움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 도움을 초기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유대인의 일반 윤리와 헬레니즘 유대의 윤리에서 찾았다. 주후 2세기 기독교의 윤리 - 가령, 「열두 사도의 가르침」과 「바나바의 편지 에 요약된 것 가 얼마나 신약 성경 이외의 자료에 근거를 두는지를 살펴보면 참으로 놀랍다. 스스로를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 새로운 '종족'으로 여겼던 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공동생활에 필요한 것을, 자신들이 결별했던 자들의 법률과 관습에서 빌려오되 그것들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았다. 수도원의 규율들도 이 점에서 상당히 비슷하다. 누르시아의 베네딕투스는 모든 규정과 방침을 성경적 토대 위에 세우고자 애썼다. 하지만 신약 성경으로 충분하지 않았고, 성경을 모두 동원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새 공동체를 다스리기 위해 사회생활에 관한 옛 사상에서 그
규율을 찾아야했다. 성경의 규정과 성경 이외의 규정들을 제시한 그 정신만 봐도 문화를 도외시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중용과 인내를 권할 때는 언제나 스토아학파의 뉘앙스를 풍기곤 했다. 톨스토이가 무저항을 거론할 때도 루소의 관념이 그 배후에 있었다. 설사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유산 이외에 다른 것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별도의 공동체는 새로운 문화를 개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공동생활에 필요한 어떤 것의 창안, 인간적 업적 달성, 가치의 한시적 구현, 조직화 작업 등을 모두 진행하게 될 것이다. p161

그리스도인이 이우사랑에 이끌려 가정, 경제, 국가, 정치 등 여러 ㄷ더공동체에서 자기 과업을 수행하는 경우에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소명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가족, 사유재산, (권위에 순종하는) 개인적 독립과 영예"는 도덕적 건강과 인격 형성에 필수적인 요소들이다. 공동선을 위해 시민의 의무를 다하고 본인의 사회적 소명을 충실히 감당할 때만 그리스도의 모범을 좇는게 가능하다. 리즐의 사상에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별개로 보는 이원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노력은 하지 않고 하나님에게만 의존한다고 비난하는 반기독교 분자들의 주장을 뒷받침 주는 그런 유의 이원성은 아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이 모두 그 나라를 실현하는 일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외부로부터 인간 공동체를 대상으로 일하는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양심을 통하여 공동체 안에서 일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리스도 자신도 이중성을 지닌다. 그분은 제사장인 동시에 예언자이고, 은혜에 의존하며 기도하는 성례전적 공동체에 속해 있는 동시에 여러 기관에서 윤리적 노력을 기울여 자연을 이기고 승리하려는 문화적 공동체에도 속해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어떤 갈등이나 긴장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제사장은 예언자의 이상이 실현되게 하려
고 죄 사함을 중재하는 것이고, 그 기독교 공동체의 창설자는 동시에 문화의 역사에서 하나의 위대한 진보를 장식하는 도덕적 영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p194